산밤 따 풋밤 씹는 알딸딸하고 달콤한 추억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밤벌레까지 씹어 먹으면 단백질까지 보충

등록 2003.09.20 12:53수정 2003.09.2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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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 이 건 두 알 밖에 안들어 있네요.
밤송이. 이 건 두 알 밖에 안들어 있네요.김규환
아름드리 밤나무에 아람이 입을 쩍쩍 벌린 것이 석류를 닮았다. 그 알맹이를 알밤, 밤톨이라 한다. 가을바람 살며시 흔들어주면 찬 이슬 내린 풀잎 위에 “후둑후둑” “툭툭” 떨어진다. ‘꼴 베던 낫을 던져두고 나갈까, 하던 일 팽개치고 야산으로 나가볼까.’


잘 익은 갈색 밤톨이 떨어져 땅 위를 뒹굴면 어슬렁거리던 다람쥐, 청설모, 들쥐도 깜짝 놀라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선다. 곧 다가와 이리저리 굴려 제들이 찾는 꿀밤이었다는 걸 확인하느라 정신없다.

그 때 빈 밤송이라도 하나 툭 등짝으로 떨어지면 고슴도치가 제 새끼 보호하려 달려든 것으로 착각 하고 “끽” 소리 한 번 지르고 물러선다. 별일 아니라는 걸 재차 인식하고 앞다리로 꼭 누른 뒤 정낭에 담아 굴로 돌아간다.

뭇짐승 온 가족이 모여 밤 껍질 까서 배불리 먹는 풍경이 보고 싶다. 들녘 벼, 수수도 고개를 숙이고 상수리, 도토리 익어간다. 아침저녁으로 싸늘함을 느낄 수 있으니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건가?

비 온 다음날 아침에 가면 더 많습니다.
비 온 다음날 아침에 가면 더 많습니다.김규환
내 고향은 밤나무 심을 땅이 마땅치 않다. 400m대가 밭이고 산은 7~800m다. 경사도 급해 밭을 만들 만한 땅이 거의 없다. 그러니 밤 밭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고작 있어봐야 한 곳이었는데 산 주위에 철조망을 2중으로 쳐놓았기에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뿐인가? 감나무 밭에 가는 길에 멀리서 한 번 쳐다보면 매번 주인이 먼저 와서 기다리니 얼씬 조차 못했다.

우린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론 형과 더러는 친구들과 보자기대신 학교에 만날 들고 다녔던 책가방을 들고 산으로 간다.


“저 놈들이 뭣할라고 산에 가방을 갖고 간댜?” 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계셨다. 책가방을 들고 산으로 가는 까닭은 밤 찾는 방법이나 밤 재배법을 궁리하려는 게 아니었다. 시금털털한 김치냄새 풍기는 빈 가방에 ‘산밤’을 가득 담아 오려는 것이다.

가운데 있던 납작한 것은 쪼각밤(조각밤)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는 꼭 나눠 먹어야 '뻐드렁니(덧니)' 안 나는 것 아시죠? 쌍둥이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건가?
가운데 있던 납작한 것은 쪼각밤(조각밤)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는 꼭 나눠 먹어야 '뻐드렁니(덧니)' 안 나는 것 아시죠? 쌍둥이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건가?김규환
소 먹일 깔을 주섬주섬 베어 꼴 청에 휙 던져놓고 달음질을 하여 산으로 간다. 몇 해 거르지 않고 가보았던 곳이라 어느 산 어드메 야생 산밤나무 ‘똘밤’(‘똘밤’의 ‘똘’은 ‘똘배’처럼 야생 열매를 말한다. 개복숭아, 개살구, 개옻나무 등 주로 약재로 사용되는 개량이 안 되어 열매가 무척 작고 단단하다. 시고 쓰고 떫고 시큼하기 때문에 이제는 손길을 잘 타지 않는다.) 나무가 많은지 훤하다.


우리가 나무 베러 한두 번 다녔던가? 나무 할 때도 밤나무를 보면 자르지 않는다. 가을을 기다린 보람을 맛보기 위한 몸부림이다. 오늘도 손엔 녹슨 무쇠 낫이 들려 있다.

“아직 여기는 없나 보네?”
“글게. 더 위로 올라가 보까?”
“쩌기 꼴짝 까장(까지) 올라가야 한가벼.”
“야 여기 한나 있다. 잘 익었능가 까보자.”

작년 베어 둔 밤나무가 썩어 버섯이 피었습니다. 이게 시들고 마르면 거무스름한 운지버섯이 됩니다.
작년 베어 둔 밤나무가 썩어 버섯이 피었습니다. 이게 시들고 마르면 거무스름한 운지버섯이 됩니다.김규환
키 작은 산 밤 나무 가지를 잡아 당겨 밤송이 하나를 땄다. 손이 찔려 따갑다. 송이를 발로 밟고 낫 등 끝으로 밀쳐 가시를 눌러 껍질을 깐다. 아직 덜 익은 상태라 꼭지 아닌 쪽을 살펴 여러 차례 돌파구를 찾았지만 쉽지 않다. 밤송이가 자꾸 도망치려만 든다. 데굴데굴 몇 번을 굴렀을까?

“아얏!”
“왜? 낫으로 벼부렀냐?”
“빈거시(벤 것이) 아니고 발목을 밤까시가 찔렀어.”

옹색한 경사진 비탈길에서 산밤 까기는 쉽지 않다. 단단히 채비를 한다고 두꺼운 나일론 양말을 신었건만 까만 고무신이라 어쩔 도리 없이 찔리고 말았다. 밤 가시는 옷도 뚫어 쏘아대는 땅벌같이 따갑게 공격을 한다. 그 알밤을 온전히 익게 하려고 아예 가시를 수 만개 덕지덕지 붙여놓고 사는 걸 어찌 말릴 수 있겠는가?

“야 아직 덜 익었는데. 한갠 아예 비어 있다.”
“아따 완전히 풋밤이구만.”
“자~.”
“정말 좆만 하네.”

아래쪽에 있던 것은 알이 꽉 차지 않았다. 푸릇푸릇한 엄지 손톱만한 밤 껍데기를 입으로 물어뜯으니 벗기니 하얗고 미끈한 비누 같은 껍질 비늘(果皮)이 드러난다. 제 아무리 기침에 좋다고는 하나 씁쓸하기가 말이 아니어서 뱉어 내지 않고는 그냥 못 먹는다.

“퉤! 퉤!”
“튀! 튀!”

“징그럽게 쓰구만~”

입안 딱딱한 부분만 빼고 혀와 부드러운 부위가 마취 당한 듯 뻣뻣하다. 이 사이에도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의 이물질이 끼어있다.

“톡!” 소리가 나며 개암 씹는 소리가 귀에 울린다. 보드라운 알맹이가 씹혀 입안을 온통 달콤하고 달큼하다. 풋밤 맛을 무엇에 비길까? 그 덕에 힘겨운 줄을 잊고 박차고 올랐다.

밭 가에 돌배(아그배)가 귀엽고 붉게 익고 있습니다. 다 익어봐야 쌀 두배 크기 밖에 안됩니다. 노란 잎은 칡잎.
밭 가에 돌배(아그배)가 귀엽고 붉게 익고 있습니다. 다 익어봐야 쌀 두배 크기 밖에 안됩니다. 노란 잎은 칡잎.김규환
200여 미터 더 올라 산 정상에 거의 이르자 골짜기가 하나 있다.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땅에 두고 한 사람은 나무 위에 오르기로 했다. 오르는 동안에도 밤송이가 몇 개 떨어진다. 튼튼한 나뭇가지에 발을 올리고 작은 나무를 잡고 발을 굴려대니 후두둑 무수한 밤톨이 떨어진다.

“지미, 흔든다고 하고 해야제.”

밤송이가 정수리를 툭 치고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쑤셔오기 시작했다. 모자라도 쓰고 왔으면 좋으련만. 타잔의 후예를 자처한 터라 그 한마디 뱉고 말았다.

알밤을 먼저 줍고 꺾어 내려주는 가지에 달린 밤을 낫으로 까 나갔다. 밤 까면서 껍데기만 벗기고 비늘은 긴 엄지손톱-까만 때가 잔뜩 낀 손톱으로 밀어 벗긴다. 이제 쓰고 떫은맛을 입에 대는 건 못할 짓이니 더뎌도 하는 수 없다.

“어두워지겠는데, 얼렁 가야쓰겄어.”
“알았어. 저 나무만 더 하고 가자.”
“글다 개호랭이 나오믄 어쩔라구?”
“설마 둘이나 있는디 뭔 일 있겠냐.”

바닥엔 밤 껍질이 하얗게 비웃고 있다. 주워 모은 것은 갈색, 안에서 꺼낸 것은 파랗다. 한데 모아 보니 닷 되 가량 되겠다.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다. 마저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낫 꽁지와 손톱이 시퍼런 감색(紺色)으로 변해 있었다.

한개는 어디로 갔을까? 밤 밭에 가면 다람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조금은 야하게 웃고 있는 밤송이.
한개는 어디로 갔을까? 밤 밭에 가면 다람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조금은 야하게 웃고 있는 밤송이.김규환
“야 이놈들아 소죽 안 쑤고 어디 갔다 왔어 시방?”
“거시기….”
“거시기 뭐 어쨌다는 거여? 헐 일은 해놓고 놀아야제.”
“밤 까로 평까끔(평산 平山)에 갔다 왔어라우~.”
“얼릉 밥 묵자.”

저녁밥을 먹고 한 시간 쯤 지나 가방을 털어보니 말로 절반은 되었다. 솥단지에 넣고 삶는 일은 누나가 했다. 우린 가시에 찔려가며 밤을 까서 왔으니 집에 남은 사람이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여물이 잘 든 것은 단단함을 유지하고 있고 풋밤은 껍데기가 쭈글쭈글 줄어들었다.

“야~ 정말 포근포근하다잉~.”
“아까 나 밤송이에 머리통 두 대나 맞아불었어.”
“긍께 누나랑 우리 식구가 이렇게 맛있는 먹는 것 아니냐.”

아버지와 어머니도 서너 개 드셨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복숭아와 밤은 호롱도 없는 깜깜한 밤에 먹어야 맛있다.’ 왜 인고 하니 복숭아와 밤에는 벌레가 많아 환한 대낮이나 밝은 빛 아래서는 차마 눈뜨고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벌레마저 먹으면서 고단백을 모두 섭취하려한 어른들의 배려 아니었을까?

내일은 밤 밭으로 지네를 보러가야겠다. 벌써 마음이 바빠진다.

한 20분 주워 모은 밤. 아이들 삶아주니 잘 먹습니다. 굳이 이 정도면 소쿠리나 봉지 들고 가지 않아도 됩니다. 양쪽 바지 주머니가 배불러지는 모양새도 어릴 적 추억하기 참 좋습니다. 더 주우면 윗 주머니에 넣으면 한 쪽으로 기웁니다. 하하하.
한 20분 주워 모은 밤. 아이들 삶아주니 잘 먹습니다. 굳이 이 정도면 소쿠리나 봉지 들고 가지 않아도 됩니다. 양쪽 바지 주머니가 배불러지는 모양새도 어릴 적 추억하기 참 좋습니다. 더 주우면 윗 주머니에 넣으면 한 쪽으로 기웁니다. 하하하.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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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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