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모처럼 만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아들들과 함께 으름, 도토리를 따던 날

등록 2003.09.22 02:09수정 2003.09.2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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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아, 모처럼 만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여름 내내 눅눅하게 내려앉아 있던 뚜껑이 활짝 열렸습니다. 본래 하늘이 이랬었구나, 기억 저편을 더듬어야 할 정도로 맑았습니다. 언제 적에 보았나 싶을 정도로 뭉게 구름 또한 참나무 연기처럼 두둥실 맑았습니다. 밝고 따사로운 볕이 좋았습니다.


마당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길게 빨래 줄을 대고 금방 베어 손질한 푸른 장대를 하늘 높이 치켜올렸습니다. 아내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묵은 빨래들을 가볍게 내걸었습니다.

a 아내는 하늘 높이 장대를 세우고 묵은 빨래를 널었습니다.

아내는 하늘 높이 장대를 세우고 묵은 빨래를 널었습니다. ⓒ 송성영

장롱 속에 박혀 있던 지난 가을의 긴소매, 긴 바지도 함께 널었습니다. 비로 인해 엉망이 된 고추밭에서 그나마 건진 빨간 고추도 소쿠리에 담아 볕 좋은 지붕 위에 널었습니다.

a 비로 인해 고추밭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나마 건지 빨간 고추를 볕 좋은 지붕위에 올렸습니다.

비로 인해 고추밭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나마 건지 빨간 고추를 볕 좋은 지붕위에 올렸습니다. ⓒ 송성영

나는 긴 장대를 이용해 아이들과 함께 사랑채 옆 개울가 아카시아 나무를 타고 올라 으름을 땄습니다. 알맞게 잘 익은 으름은 쩍쩍 벌어져 있었고 달콤했습니다.

"어으. 맛있다, 달콤하다."

a 사랑채 옆 개울가에 으름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사랑채 옆 개울가에 으름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 송성영

작은 아이 인상이는 아빠의 으름 핥아 먹기에 동참했지만 무엇이든 낯선 먹이 앞에서 지레 겁부터 집어먹는 큰 아이 인효는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한마디 툭 던집니다.

"아빠, 이거 우리 나라 전통 바나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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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점심 무렵에는 막둥이 삼촌과 함께 넷이서 뒷산에 올랐습니다. 풍산개 씨를 받은 '돌진이'도 데리고 갔습니다. 모처럼 만에 산행에 동참한 돌진이 놈은 이름에 걸맞게 온통 산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본래 뒷산 계곡으로 으름을 따러 갔던 것이었는데 도토리도 줍고 이제 마악 벌어지기 시작한 산밤도 주었습니다. 산밤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도토리는 지천에 널려 있었습니다.


인상이는 "여기도 있네, 저기도 있네"하며 정신 없이 도토리를 줍고 있는데 억지 춘향이로 따라온 인효는 빈둥거리며 딴 짓만 하고 있었습니다. 도토리보다도 컴퓨터가 눈 앞에 어른거리나 봅니다. 오늘은 인효가 컴퓨터 하는 날이었거든요.

"넌 도토리 안 줍고 뭐 하냐?"

"우리가 도토리 다 주워 가면 다람쥐들은 뭘 먹고 살어? 아빠가 그랬잖아, 산에 있는 열매는 다 산짐승들 먹이라고."

"너 그래서 안 줍는 거야? 걱정 하지마. 임마, 산짐승들 먹을 것은 남겨 놓을 테니까. 그리고 요즘은 다람쥐도 없어, 죄다 청설모 놈들뿐여."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집 돌담장에서 오락가락했던 다람쥐들이 요즘은 통 보이질 않습니다. 뒷산에 올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잣나무나 호두나무를 무지막지하게 작살내고 있는 청설모 놈들의 횡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막둥이 삼촌이 빈둥거리며 짐짓 다람쥐 걱정하고 있는 인효에게 한마디했습니다.

"그럼, 당뇨 앓고 계시는 할머니께 도토리를 갖다 드리면 좋겠다."

인효도 이 말에는 군소리 없이 동의했습니다.

도토리, 산밤, 으름으로 작은 배낭을 반쯤 채우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막둥이 삼촌이 바지 주머니에 넣고 온 손바닥만한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우리 삼부자 등 뒤 저 만치에 계룡산의 연천봉과 삼불봉이 훤히 들어왔습니다. 거기에다가 푸른 하늘, 해맑은 구름이 머리 위에 걸쳐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삼부자가 나란히 사진을 찍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인 듯싶었습니다. 늘상 아빠인 내가 사진을 찍어 주다 보니 네 식구가 나란히 앉아 자동으로 찍은 사진은 있어도 정작 두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소중한 사진을 찍게 된 것도 모처럼 만에 열린 하늘 덕분인 듯 싶었습니다.

오늘은 모든 것에 감사한 날이었습니다. 하늘, 그리고 아래 맑은 산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큰 아이 인효 말대로 산짐승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달콤한 으름도 실컷 따먹고 도토리에 산밤까지 주웠습니다. 단지 운동 삼아 다리품만 팔았을 뿐인데 산은 풍성하게 내주었습니다.

내가 씨 뿌린 것도 아닌데 하늘 아래 저절로 자란 것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여름 내내 그토록 실망스럽게 드리워 있던 하늘이 다 내준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저 내준 것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새삼스럽게도 호박꽃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습니다. 줄기차게 내렸던 빗줄기로 인해 크기도 전에 썩어 나자빠졌던 애호박들, 그런 호박 줄기들이 고맙게도 다시 앞다퉈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아, 지금 이 시간 밤하늘은 또 얼마나 고마운지요. 어둠 속에서 초롱초롱한 별빛들이 환장하리 만큼 가득합니다.

나는 오늘밤 컴퓨터 앞에서 벗어나게 되면 마당 한가운데 턱하니 의자를 놓고 앉아 하염없이 밤하늘을 올려다 볼 생각입니다. 어제 자정 무렵에 보니 아직은 깎아 놓은 손톱만큼이나 작지만 아주 맑고 이쁜 달빛이 떠 올랐었거든요. 어제 밤처럼 달밤에 체조라도 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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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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