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첫 자리에, 너를

꽃과 아이들, 그리고 생명에 대하여

등록 2003.09.24 08:34수정 2003.09.24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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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과꽃

과꽃 ⓒ 안준철

흔히 아이들을 꽃에 비유하곤 합니다. 남학생보다는 여학생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지요. 저도 언젠가 반 아이들에게 준 편지에 '사랑하는 서른 네 송이 꽃들에게'라고 제목을 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워' 라는 유명한 노랫말도 있지만, 저에게 꽃은 곧 아이들이고, 아이들이 바로 꽃입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기에 꽃입니다. 길을 가다가 꽃을 보면 그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만 쪼그려 앉고 말지만, 꽃만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꽃 속에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꽃을 바라보는 눈길이 더 깊어지고 그윽해지는 건지도 모르지요. 꽃 중에서도 소박하고 망울이 작은 꽃에 더욱 눈길이 갑니다.

아무리 작은 꽃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한 우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꽃 이름이 '코스모스'인지도 모르지요. 저는 한 송이 꽃에서 작은 우주를 봅니다. 꽃이 보석과 다른 것은 꽃은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석을 바라볼 때와는 달리 꽃을 바라볼 때 긴장이 느껴지는 것도 바로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도 긴장을 느낍니다. 물론 그들 안에 있는 생명 때문이지요. 누군가 물을 주지 않으면 꽃리 시들고 밀라버리듯이 아이들도 잘 가꾸지 않으면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천부적으로 주어진 생명이지만 누군가 물을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을 주어야 합니다.

물이 싱겁다고 물대신 우유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물보다 값이 더 나간다고 금가루나 은가루를 뿌려서도 안됩니다. 그냥 물이어야 합니다. 물을 먹고 그 안에서 영양을 만드는 것은 꽃의 몫이고 아이들의 몫입니다.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지요. 그 스스로 하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주는 물은 '관심'입니다. 생명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것만으로 족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꽃을 피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들 중에는 애가 탈 정도로 늦게 꽃망울을 맺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아니, 아직까지 망울의 흔적조차 없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디더라도 그들도 꽃을 맺고야 말 것입니다. 누군가 꾸준히 물을 주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꽃을 가꾸는데 물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하늘이 주신 그대로인 바람과 햇살, 그리고 자연의 토양에서 꽃을 키우는 것입니다. 향그러운 바람과 따사로운 생명의 햇살을 가로막고 대신 온풍기를 틀어주는 식의 재배법은 어리석은 자들의 선택일 뿐입니다. 조기교육 운운하며 자연의 속도를 거스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엊그제 저는 밤을 꼬박 세우고 말았습니다. 생일 시를 써주어야 할 아이들이 밀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을 피우느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리된 것입니다. 사실은 시가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도서관을 꾸미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아이들이 제 삶의 첫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사실조차 아이들에게 숨기지 않고 고백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에게 생일 시를 써주는 일이 대단한 것이 아닌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시를 쓰려면 대상에 집중해야하는데 저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집중해 있었거든요. 여러분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제게 하나의 커다란 우주였으니까요.

그런데 요즘 도서관 일에 몰두하다보니 그랬는지 제 마음이 조금은 변한 것 같았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이제 다시 제자리를 찾았어요. 그것이 제 자신을 위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평생에 남을 만한 빼어난 시를 쓰는 것도 아닌데 잠을 빼앗기며 시를 써준다는 것이 까마득한 남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문제는 그렇게 시쿤등한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제 마음 속에 의심없이 머물고 있던 행복도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솜씨가 없어서 때로는 잠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기를 쓰고 아이들의 생일 시를 쓰는 것은 순전히 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a 한 데 어울려 핀 과꽃

한 데 어울려 핀 과꽃 ⓒ 안준철

<생일 시, 하나>

넌 지금 잘 익어가고 있겠지?

어느 날 시골길을 걷다가
나는 보았지.
바람에 스러지고
일어나 다시 일렁이는
들판 가득한 연초록 물결,
바닥까지 누웠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내지르는
푸른 함성을 나는 들었지.

그때 나는 생각했지.
흔들리지 않는 생은 아름답지 않다고.

저 생명의 괴로움
가난한 땅에 아픈 뿌리 내리고
땡볕을 견디는 여린 잎새들.
우리의 고봉밥이 되고
우리의 맑은 살이 되기까지
고통의 바람은 차라리
철철 넘치는 샘물 같았지.

가끔은 아주 가끔은
너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난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넌 지금 뿌리를 내리는 중이라고.
인생의 땡볕을 견디고 있는 중이라고.

그런 선생님의 믿음대로
넌 지금 잘 익어가고 있겠지?
너의 열 여덟 눈부신 나이가
부끄럽지 않겠지?

a 때를 놓치면 이렇게 넉넉해지기도 한다

때를 놓치면 이렇게 넉넉해지기도 한다 ⓒ 안준철

<생일 시, 둘>

넉넉하고 아름다운 사람

너하고 호박하고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고
아마 넌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얼굴이 둥글둥글하고
예쁘장한 것이
영락없이 호박이야.

그런 싱싱하고 예쁘장한
애호박을 따기 위해서는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단다.
딱 고만할 때 따야
식구들 아침 밥상에 오를 수 있거든.

아차, 때를 놓친 호박들도
여름 한철이 지나면
너의 곱고 넉넉한 성품처럼
둥글넙적해지고
안은 안대로 노랗게 익어
이웃집 밥상에도 오르게 되지.

넌 지금 조금 늦었을까?
아니면, 딱 알맞을까?

어느 쪽이든
넌 정말 탐스러운 아이지만
만약 조금 늦었다면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좀더 너를 익혀
가난한 이웃집 밥상에도 오르는
넉넉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렴.

a 바다에 핀 꽃

바다에 핀 꽃 ⓒ 안준철

<생일 시, 셋>

너의 간절한 눈빛

너에게서 온 편지들은
서너 줄 쓰고
저만큼 아래로 내려가
또 서너 줄 쓰고

그 글과 글 사이
침묵의 여백처럼
넌 가끔 결석을 하고
대신 메일을 보내오곤 했었지.

선생님 마음 아프게 해서 죄송하다고
그 한 마디가 반갑고 고마우면서도
행여 오랜 습관으로 자리잡을까봐
널 많이 나무란 적이 있었지.

그때 눈물나게 고마웠던 것은
부족한 선생님의 사랑을
꼭 붙잡으려는 너의 간절한 눈빛!

봄 소풍 땐 나로도 바닷가에서
넌 나의 귀여운 모델이 되어 주었지.
그런 예쁘장한 외모보다도
너의 영혼은 더 아름다울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단다.

요즘 수업시간에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이
환한 표정으로 단어를 찾고 있는
너의 달라진 모습이 얼마나 빛나 보이는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넌 이제 열 여덟 눈부신 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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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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