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마음 속에 호박이 들어갔다

어른이 읽는 유치원교실 2

등록 2003.09.26 13:42수정 2003.09.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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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유치원 아이들이 키우는 호박과 고추

유치원 아이들이 키우는 호박과 고추 ⓒ 신영숙

늦은 봄. 타원형의 예쁜 떡잎만 달고 우리 유치원 텃밭에 심어진 호박 세 줄기.

놀이터에서 놀다가도

"선생님, 이파리가 커졌어요."
"선생님, 줄이 생겼어요."
"선생님, 꽃이 피었어요."
"선생님, 벌이 두 마리나 꽃 속에 있어요."

우리 아이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 울타리를 타고 한여름 무성하게 너울댔고 잦은 비에 꽃만 피고 엄지만한 호박이 열렸다가 떨어져서

"에이, 또 떨어졌어요."
"밤에 누가 몰래 따버린 것 아니에요?"

아쉬움을 남기고 한달여 방학동안 우린 호박 덩굴과 이별을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온 우리 아이들 앞에 동그란 호박이 매일 숨을 모아 풍선을 부는 것처럼 자랐다. 처음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손으로 그리더니, 팔까지 동원하여 호박이 자랐다고 아침마다 선생님보다 그 호박에게 인사를 먼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 호박 없어졌어요."


속상하다고 모두 달려나가 확인 해보고

"에이, 에이"를 연발하다 매일 들여다보고 마음 준 것이 우리 앞에 사라진 허무함을 달래기도 했다. 유치원에 소풍 나온 사람 중에 둘러보다 마음이 동하여 가져갔나 보다.

a 호박아, 미안해.

호박아, 미안해. ⓒ 신영숙

얼마 후 잦은 비가 그치고 조그맣게 맺은 호박 열매가 서너 개나 동시에 열려서 매일 우릴 기다리게 했다. 고추는 자기 나무에 열린 것 따 가지고 갔는데 호박은 숫자가 적어서 누가 가져 가야하는지 매일 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정작 호박이 다 커서 따야할 때까지 결론이 안났는지

"선생님 어떻게 해요? 누가 가지나요?"

서로 가져가야 한다고 한참을 우기는데

"애들아, 호박으로 무얼하는데 가져가려고 하니?"

물었더니

"된장국이요." "떡이요." "부친개(부침)요." "과자요."…

"그럼 우리 모두 나눠먹게 유치원에서 만들자."

우린 호박 부침을 하기로 하고 몸이 아파서 결석하고 있는 친구에게도 알리고 드디어 오늘 요리활동을 했다.

a 이렇게 써는거야.

이렇게 써는거야. ⓒ 신영숙

둘러 앉아서 애호박을 썰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썬 친구의 호박을 바가지에 담고

"넌 너무 크게 썰었어. 야, 넌 좀 작게 잘라야지."

먹어본 기억을 더듬어 크기도 지들끼리 조정하고

"그런데 정말 이게 맛있을까?"

반신반의 하며 자르고 나서 밀가루와 호박과 물을 넣고 자기가 먹을 크기만큼 부쳤다.

a 각자 다른 크기지만 어울리니 친구예요.

각자 다른 크기지만 어울리니 친구예요. ⓒ 신영숙

얼마나 다들 열심인지 평소 개구쟁이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진지하게 둘러앉아 부침을 부친다.

"넌 너무 크다. 네 것, 너무 탄다. 내 것에 붙게 하지 마. 헤헤 너 뒤집다가 망쳤다."

뒤죽박죽 만들어진 것 같아도 호박부침이 완성되었다.

맛있게 먹고 하는 아이들 한 마디.

"호박아, 나중에 또 해 줘. 꼭이야. 알았지?

"호박아, 사랑해."
"엄마한테 만들어 주라고 해야지."
"우리 엄마는 이런 것 못해요. 유치원에서 또 해줘요."
"꿀맛 같아요."
"설거지는 제가 했어요."
"맛있군! 아주아주 맛있군!"
"엄마, 부침개 맛있었어요."

a 맛있겠다. 빨리 익어라.

맛있겠다. 빨리 익어라. ⓒ 신영숙

다 먹고 나서 밖에 나간 녀석들은 이제 호박꽃이 몇 개인지 호박이 어디에 열렸는지 세고 다닌다.

"선생님, 호박 또 있어요. 부친개 또 해주실거죠?"

호박이 아이들에게 크게(?) 소용이 되니 저절로 마음도 가나보다.
나도 아이들에게 소용되는 사람이어서 아이들 마음도 내게 머물면 좋겠다.

a 유등아, 네것 어딨어?

유등아, 네것 어딨어? ⓒ 신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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