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난 확실히 촌놈이다. 얼굴 자체가 시골뜨기고 먹는 것도 그렇고 하고 다니는 차림새도 그렇다. 농사 지으면 딱 알맞은 몰골이라 할까. 내가 태어나 미장원이나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한 건 세 번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이발소에서 깎는다. 어릴 땐 아버지께서 손수 깎아 주셨다.
지금은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는 이발 기계 '바리깡'과 가위, 면도기를 하나 장만해 두셨다.
"아야?"
"예, 아부지."
"니 머리가 그게 뭐냐?"
"왜라우?"
"밤송이 같아 가지고 쓰겄어?"
"다른 애들도 다 이런디요."
"안되겠다. 들어가서 책보하고 이발 기계 갖고 오니라."
"뭐 할라고라우?"
"머리 깎아야 쓰겄다."
"별로 길지도 않은데 왜 그려신다요?"
"씨잘 데 없는 소리 말고 얼렁 들어갔다 와~"
이 때 어머니가 끼어들어 내 편이 되어보지만 상황 반전은 이미 틀렸다.
"아따 지기 아부지, 지가 싫다고 하는디 왜 그싼다요? 며칠 더 있다가 깎아도 되겄구만."
"안 된당께. 정신 상태가 흐리멍텅해가지고 뭔 공부를 한다고 그려 시방…."
공부도 그러고 보면 적당히 할 일이다. 잘 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애들 머리마저도 자유롭게 가만 놔두질 않는다. 남들 놀 때 놀지도 못하고 책을 들여다보는 척이라도 해야 하니 얼마나 고역인가?
아버지는 일제 시대 15살 때 글줄이나 읽으셨던 할아버지 대신 징용(徵用)에 끌려가셨다. 큰 아버지는 장남이니 집안을 지켜야 한다며 자처를 하고 나선 것이다. 소위 '아오지 탄광'을 2년여 몸소 겪으신 분이라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시기도 했지만 때론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절도(節度) 있는 몸놀림만은 꽤나 잘한 일이라고 여기신 분이다.
그러니 우리는 생활 곳곳에 밴 아버지의 습성을 따라 가기에 급급했다. 대표적인 경우로 더운 여름에도 일주일에 2번 이상 멱을 감으면 몸에 있던 양분이 다 빠져나가니 안 된다고 하셨다. 저녁 9시 이전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새벽 5시에는 일이 있든 없던 일어나서 거동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방학이라고 늦잠 자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다. 밥 먹는데도 젓가락으로 '깨잘깨잘(볼품없이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밥 먹는 모습을 그린 의태어로 전라도 사투리)' 먹으면 숟갈을 아예 놓고 배고플 때까지 밥숟가락을 뜨지 말라고 하셨다. 언제나 중학교 다닐 때까지는 방석도 없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약주를 드시면 늘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니 아부지는 못 배운 일자무식이다본께 오가는 데 십리 길인 평지로 야학을 다녔다. 겨울에는 저녁에 갔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 집에 왔어. 근데 훈장님께서는 우리를 4시 반에 깨워 얼음장으로 데리고 가셨다.
서로 안 들어가려고 하니 선상님(선생님)이 먼저 옷을 홀딱 벗고 얼음 위로 올라가서 얼음 찜질 목욕을 하고 우리들에게 물을 끼얹어 들어오지 않고는 못 배기게 했단다. 밖에 있으면 더 추웅께(추우니까)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 막상 들어가면 그렇게까지 추운 것이 아녔어.
글다 보면 하루가 개안(개운)하여 공부가 쏙쏙 들어왔다. 공부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여. 맑을 때 한 자 한 자 들어와 박히는 것을 뭐 할라고 눈 아프게 오래 앉아 있냐 말이다."
이렇게 엄한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손찌검이나 매질 한 번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 호령은 누구도 감당해 낼 수 없이 쩌렁쩌렁 하셨으니 반대라는 걸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순둥이, 순진한 내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하면 믿고 맡기셨고 웬만하면 들어주셨다.
내 어릴 적 별명은 '삔치(찌르레기 비슷한 새의 전라도 사투리로 날렵하며 영리한 데가 있어 붙여졌다)'였다. 그런데 그 '삔치'의 머리가 털북숭이처럼 되어 있으니 맘에 안 드셨을 게다.
이발 기계를 직접 가져오시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쇠죽 쑤던 부삭(부엌)에 짚으로 엮은 널찍한 깔판을 놓고 앉게 하시고는 책보자기를 목에 둘러놓고 쓱싹쓱싹 삭둑삭둑 내 긴 머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자르셨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거늘 어찌 그리 한 올 남기지 않고 자르시는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꿈쩍 않고 있어야 한다. 내가 친구처럼 가까이 했던 누렁 소는 동무의 곡절을 알기나 하는 건지 콧방귀만 연신 꿔 댄다.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앗야! 아부지…."
"왜 그냐? 씹혔냐?"
"천천히 좀 허싰쇼. 워메, 아픈 거. 부스럼 난 것도 아닌데 왜 요로코롬 아프다요?"
가축은 물론 사람이 아파도 신도마이신 등 항생제 주사를 직접 정맥과 동맥을 골라 직접 놓으실 정도로 솜씨가 빼어나셨다. 응당 이발도 돈을 아끼는 것보다 부정(父情)의 대물림 방식의 하나로 당신께서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며 내가 학교 간 뒤로 그렇게 해 오신 것이다.
중학교 2학년 1학기 때까지 아버지는 이렇게 손수 머리를 깎아 주셨다. 그런데 2학기 때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서서히 거부(拒否)를 하기 시작했다. 1학기 때 몇 번 스포츠 머리를 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으나 아버지 말씀을 완강히 거역(拒逆) 할 수 없었다. 속을 앓다가 끝내 반기(叛起)하니 '그래, 이 놈마저 이제 나를 뜨는구나!'하며 얼마나 힘겨웠을까?
"아부지, 저 인자(이제는) 아부지 한테 머리 안 깎을라요!"
"왜그냐?"
"챙피해서 안 되겠어라우~"
"뭐시?"
"부스럼 흉터가 다 나와각고 빡빡 밀고 가면 얼마나 애들이 놀리는 줄 아세요?"
"너만 부스럼 났다더냐?"
"글고라우 여자애들 앞에서 얼굴을 못들겠당께요."
"그럼 이번만 깎아 주마."
"안돼요. 이참에 아예 이발관에 가서 깎을랍니다."
막내아들의 집요한 몽니에 아버지는 그날 져주고 말았다.
부스럼 흉터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건 슬슬 여자아이들 눈치를 살핀 사춘기(思春期) 절정일 때의 일이니 용서 받을 수 있다. 또 하나 고백하건데 그 때부턴 용돈이 필요했으니 2,000원 받아서 무허가 할아버지에게 500원 주고 깎고 나머지는 유흥비(여자 아이들과 고구마 튀김을 먹는 일)로 탕진하려한 속내를 알고나 계셨는지….
오늘 머리도 길고 하니 이발소에 가서 머리는 이발사에게 내 맡기고 꿈에서라도 잠시 아버지를 만나고 와야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