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우글거렸던 골짜기로 '으름' 따러 간 날

[어릴 적 허기를 달래주던 먹을거리 12]처음 먹은 아이스크림 보다 달고 맛있는 으름

등록 2003.09.27 19:39수정 2003.09.2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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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
산세를 보아 습하고 응달진 밀림엔 칡, 다래, 노박덩굴, 으름 등 넝쿨 천지다. 타잔이 넝쿨을 타고 계곡을 건너다닐 성 싶은 정글 숲 서북사면(西北斜面)에는 특히 으름넝쿨이 치렁치렁 나무를 감아 타고 올라간다. 으름 꽃은 5월 초에 핀다. 깨알 보다 조금 큰 꽃은 마치 삶아서 푹 퍼진 팥 알맹이 같다.


‘으름넝쿨’을 보았는가? ‘으름’을 아는가? 내 고향에선 ‘어름’이라고도 부르는 으름을 한 번 먹어본 사람은 바나나는 입에 대질 않는다.

시골에 갔다 온지 얼마 안됐건만 난 또 고향에 가고 싶다. 올 추석이 빨라 이제야 으름이 익었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방금도 고향 형에게 전화를 했더니 대뜸 “내려 올려고?”한다. 그만큼 나는 으름이라면 환장을 한다. 그 먼 곳으로 으름을 따러 갈까 말까 고민 중이다. 초등학교 때고 어른이 되어서도 으름을 알고 맛 볼 수 있는 나는 분명 축복 받은 사람이다.

김규환
1981년 가을로 가보자.

“야, 오늘 대판이 가자.”
“알았어.”
“글먼 이따가 집에 가자마자 딴 일 하지 말고 바로 모이자.”
“밥도 먹지 말고야?”
“잉.”
“육남이 너도 갈 텨?”
“니기들 끼리 가라.”
“오늘은 같이 가자.”
“나는 깔 베 놓고 공부해야 된당께.”
“아따 오늘만 가잔께. 하루 안 한다고 전교 1등 못 한다냐?”
“그래도 난 안 돼.”


토요일 오후 열다섯 살 승호와 해섭, 병문, 병섭과 함께 학교가 끝나자마자 20리 길 비포장 도로 버스에 부랴부랴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한다.


다른 때 같으면 토요일은 한가로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중간 마을 원리에서 꼭 한번은 쉬곤 했다. 무허가 가정집에서 팔았던 고구마 과자를 먹으면서. 밀가루를 두껍고 둥글납작하게 튀겨 이가 빠질 정도로 꽝꽝한 고구마 과자 한 봉지씩을 깨물어 먹으며 같이 걸어오는 여자애들이랑 노닥거리며 오는 재미에 학교 다닐 맛이 났지만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다.

집에 도착하자 하늘색 교복을 벗고 청바지와 허름한 옷에 아버지 새마을 모자 하나 대충 눌러 쓰고 동네 회관 앞으로 모인다. 다들 소 꼴 베는데 한 몫을 해내는 처지라 오늘은 특별히 아버지께 허락을 받았다.


김규환
각자 청색 플라스틱 장바구니 한 개와 배낭을 메고 누렇게 익은 황금들녘 논두렁길을 달려 1시간 거리에 있는 그 골짜기로 향한다. 메뚜기가 후다닥 날며 얼굴에 부딪힌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산길로 접어들어 오르면 백아산 중 가장 험한 골짜기다.

백아산(해발810m) 대판이 골짝은 산새가 험악하고 깊어 빨치산이 우글거렸던 곳이라 어른들도 접근하기를 꺼렸다. 숯 굽는 할아버지 내외가 뜨지 못하고 산신령 노릇을 대신하고 있을 뿐 사람들이 얼씬하지 않는다.

겁 없는 애들도 이 골짜기에는 1년에 딱 한 번이다. 대밭을 지나 응달지고 습기가 많은 울창한 숲 물가에 들어서면 갑자기 차가워져 싸늘하고 오싹하다. 이슬이 모였는지 나무뿌리가 머금고 있다가 뱉어낸 물인지 돌에 부딪혀 톡톡 소리 내며 흘러내린다. 목을 축일 겸 모두 엎드려 생명수를 한 모금씩 빨아 먹는다.

숨을 고르고 곧장 땀이 식기 전에 으름넝쿨을 찾아 나선다. 나무마다 칭칭 감고 올라선 으름넝쿨이 한두 개 보인다. 때죽나무, 자귀나무, 층층나무, 떡갈나무, 고욤나무, 신갈나무 등 활엽수 숲을 마치 담쟁이 비슷하며 나무를 뱀이 꼭 감싸 포위하듯 기어오르는 으름넝쿨 천지다.

김규환
위를 쳐다보면 으름 열매가 "헤-" 하며 입을 “쩌억” 벌리고 있다.

“야, 이리 와봐. 좆 나게 많다.”
“허벌나게 많구만~.”


석류처럼 벌리고 익는 모습은 참 다래 키위 겉모양에다 바나나 길이의 1/10에 불과 하지만 그 안에 든 열매는 뽕 잎 뜯어먹는 하얀 누에가 한 마리 떡 안긴 모양이다. 세상에 이 보다 하얀 것이 있을까 싶다.

다람쥐처럼 나무에 기어 올라가서는 타잔 보다 날렵하게 가볍게 착 달라붙어 줄기를 끌어내려 줄기를 알맹이가 빠지기 않게 조심하여 끝을 따낸다. 일단 배가 찰 때까지는 바구니에 담는 법이 없다. 점심을 으름으로 대신 하니 덜 익은 것이나 담길 뿐이다. 30분쯤은 따서 배를 채우고 가족과 나눠 먹을 것을 딴다.

서너 개 따 먹을 때까지는 같이 있다가 본격적으로 딸 때는 흩어져서 딴다. 다들 다람쥐만큼 날렵하게 나무 타는 재주가 있으니 손놀림 빠른 놈이 장땡이다.

김규환
배부른 누에보다 두 배 가량 큰 것을 혀로 낼름 훑어 넣고는 그 까맣고 100개나 되는 씨앗이 씹히지 않게 우물우물하다가 얼른 삼켜 버리면 되었다. 간혹 씨를 씹으면 이 보다 쓴 것은 없었다. 그러니 먹다가 씨가 혀에 잡히면 나무 위에서 바닥으로 수박씨처럼 "퉤"하고 뱉어버리면 바닥에 부지기수로 흩어진다.

그 맛을 어찌 설명할까. 두부 집에서 따끈한 순두부를 한 그릇 쭉 퍼서 후루룩 마시는 맛일까? 입에 닿는 순간 설설 녹는 아이스크림 맛인가? 온통 입안을 황홀경에 빠트려 부드럽게 혀들 적셔주는 그 맛은 달콤한 첫 키스의 추억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하나 달랑 달린 놈은 요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만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 달린 것은 아무리 높아도 그냥 놔두는 일이 없다. 아직 아가리를 벌리지 않은 단단한 것은 바닥으로 떨어뜨려 손을 자유롭게 하고, 다 익은 것은 조심히 다뤄 줄기와 함께 나무에 걸쳐뒀다가 내려올 때 모아서 가져온다. 벌어진지 오랜 떨어지기 직전인 것은 새 밥이나 내 차지가 되었다.

김규환
얼마나 땄을까? 욕심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만 가고, 지고 들고 올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량을 땄다. 배낭에 담아 지고, 시장바구니에 가득, 등짐 위에도 올린다. 다른 손에도 줄기 째 들려 있다.

“야! 그만 가자.”
“해섭아 인자 그만 가자니까….”


어둑어둑해진 산에 몇 번 불러도 메아리 소리만 들릴 뿐이다. 얼마나 안으로 들어갔을까? 무섭다는 생각보다 나머지 애들이 딴 양이 더 궁금했다. 마지막 한 나무를 타고 올라 마저 따고 있는데 네 명이 한꺼번에 내려온다.

날이 으스름해질 무렵 숲을 빠져나와 자신의 전적을 얘기한다.

“아따 많이 따부렀다잉?”
“씨불놈 지가 더 많이 땄음시롱….”
“규환아, 넌 유난히 다섯 개 달린 것이 목에 많이 걸렸다.”
“응. 집에다 걸어 놓기도 하고 다섯 송이는 은하 주고, 여섯 송이는 해림이 줄란다.”
“야 색꺄 벌써 양다리 걸치기냐?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없는 놈은 맨날 그 팔짝(팔자)이라니깐.”
“니미럴, 쌔고 쌘거시 가시낸데 그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여.”


빈골(짐 없는 상태)로 갔던 몸이 땀까지 절어 10리를 오기는 예삿일이 아니었다. 가을 날 풋풋한 소년들의 동화는 이렇게 익어 갔다. 그렇게 배불리 먹어도 단지 화장실에 까만 씨가 나뒹구는 일 외에는 다음날 배알이도 하지 않았다.

송성영
아직도 이 맛에 나는 이때쯤 가까운 용문산(경기도 양평)에 들른다. 길거리 시장에서 1kg에 5,000원 가량 한다. 일상에 바빠 거기까지 못 가면 경동시장에 들러 아주머니께 한국산 토종 바나나를 열나게 선전해주고는 두세 알 얻어 먹는다. "이 맛을 아는 사람은 바나나 먹지 않는다"로 시작해서 어디 가면 많다, 먹는 방법까지 소상히 알려 주면 대여섯 명은 금세 모여드니 말이다. 얻어먹을 자격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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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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