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오후에 가진 명상적 성찰

화가 배정은의 '어떤 고요함' 전시회를 보고

등록 2003.09.30 01:40수정 2003.09.3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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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화가 배정은

화가 배정은 ⓒ 박소영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의 붉은 빛에 홀려 갤러리를 찾은 휴일 오후 인사아트센터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화가 배정은의 두번째 개인전 '어떤 고요함'(Something Silent)이 전시 중이다.

전시장을 한번 휙 둘러본 나는 커다란 캔버스들의 무게감에 다시 처음 발을 뗀 갤러리의 입구에서 멈추어 섰다. 이 작품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잠시 마음을 채우던 일상의 잡념들을 비워두는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만 같다.


먼저 작가의 프로필을 들여다 본다. '에프엠' 코스를 밟았군, 여기에는 정통이란 말과 신선한 개성이라는 두 극단의 대립이 장단점을 저울질하고 있다. 작품을 봐야 작가가 보이는 법.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은 넘겨두기로 하자.

먼저, 여기에 적은 감상은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의 주관적·자의적 해석임을 밝혀둔다. 작가의 의도에 대치되는 해석이라도 작품은 이제 그녀의 손길을 떠난 상태. 그녀 또한 각기 다른 감상자가 느끼는 그대로가 자신의 작품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런 점에서 현대 미술은 어렵고도 쉬운 장르다.

먼저 각 작품마다 부단한 인내를 요구하는 제작 과정이 눈에 들어 온다. 면과 솜으로 만든 무수한 정사각형의 운집은 담을 쌓아도 될 만큼 빽빽하다. 그 작은 사각형은 오미자, 홍찻잎, 치자 등과 같은 천연 염색 재료를 이용해 천과 종이에 은근한 색채로 밀도감을 느끼게 해준다. 게다가 마치 채도 낮은 우리 한복의 전통색이 주는 친근함까지 준다.

a 토담 같은 정겨운 반복의 쌓임은 어떤 기억을 되살려 차곡차곡 비밀을 만들어간다. 그 축적되는 비밀의 세월들이 낡지만 부드러운 촉감에서 삶의 진정성을 찾은 듯 보인다.

토담 같은 정겨운 반복의 쌓임은 어떤 기억을 되살려 차곡차곡 비밀을 만들어간다. 그 축적되는 비밀의 세월들이 낡지만 부드러운 촉감에서 삶의 진정성을 찾은 듯 보인다. ⓒ 박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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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네모 난 종이 위에 각기 다른 톱밥 조각에 칠을 해서 붙인 밝은 빛의 어떤 걸 가리켜 보이는 듯한 창 또는 벽.

네모 난 종이 위에 각기 다른 톱밥 조각에 칠을 해서 붙인 밝은 빛의 어떤 걸 가리켜 보이는 듯한 창 또는 벽. ⓒ 박소영

단순하면서 끝질긴 과정들은 어떤 걸 말해온다. 들릴 듯 말 듯 그 소리는 작지만 무어라고 말하는지는 알 것 같은, 그 은밀한 속삭임을 따라 몸이 움직인다. 아, 이것이 그녀의 동력인가.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단서는 순수성이란 생각이 든다. 그 순수성이란 원초적인 시간을 회복하기 위한 그녀만의 시간을 뜻한다.


내면의 성찰과 균형을 이루는 시간과, 그 시간 속에 함께 존재하는 공간. 그 공간이란 그녀에겐 캔버스이고 그 밑도 끝도 없는 공간의 깊이 속에 이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잠재운다. 작업과정이 보여준 인내와 함께 천천히, 고요히 침잠하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달팽이를 연상하게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움직임을 확인할 수 없는 달팽이. 한없이 느린 달팽이가 조급증에 시달린 우리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건 자연스런 일이다.

그 달팽이의 보폭만큼이나 더디게 진행되었을 그녀의 작품. 그녀는 달팽이의 움직임처럼 조금씩 잠재웠을 것이다. 욕망이라는 말로 비롯된 허세들을.


따라서 어떤 고요함은 내밀한 작품의 형성과정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 수많은 네모들은 곡선이 말해주는 리듬감이 없지만 커다란 캔버스 안을 차지하고 있는 깊은 정막감이 그녀의 손길과 함께 울림을 전해준다.

13점의 작품을 준비한 2년여 동안, 그녀가 가졌을 무겁고도 힘겨운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진정 이 세상의 소리들의 덧없는 흐름을 읽었는가. 그 흐름으로 그녀는 자신을 보는 맑은 눈을 가진 것인가. 아직은 중견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그녀지만 참된 것을 찾으려는 정신의 치열함이 만만치 않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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