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강한 조국을 꿈꾸었던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

등록 2003.09.30 11:36수정 2003.09.3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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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덕일의 책 '누가 왕을 죽였는가?'에 보면 인조와 그의 큰아들 소현세자, 그리고 그의 부인 강빈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인조반정으로 왕 위에 오른 인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을 겪는다. 우리 역사상 몇 안되는 치욕스런 항복의식(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까지 치른 후, 두 왕자(소현세자와 봉림대군)를 비롯 많은 수의 관료들까지 포로로 보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부터 소현세자의 비범함이 나타난다. 울음바다가 된 환송행사장에서 그는 신하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고 환송나온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독인다. 이역만리 머나먼 적국에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처지에서도 남아 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다독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역량은 비단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전후처리 문제로 조선과 청국간에는 해결해야 할 수 많은 난제들이 산적해 있었고 역학관계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승국으로써 칼자루를 쥐고 있는 청나라의 '마음대로'였다. 조선은 청의 공물요구가 기둥뿌리까지 흔들리는 과도한 것이라 해도 패전국의 입장에서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현세자는 그 모든 문제들을 조선의 입장에서 원만하게 처리해 나갔다.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적국의 수도에 잡혀온 포로의 신분이면서도 '특명대사'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과도한 공물의 요구를 줄이고 포로들의 속환을 성사시켰으며 그러면서도 왕자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조국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청국의 장수들도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청나라의 사신으로 조선을 거쳐간 많은 청국 장수들은 꼭 소현세자의 묘를 참배하고는 했다고 한다.

청 황실에서도 항상 소현세자를 가까이 두고 싶어했다. 사냥을 갈 때도 동행을 했으며 심지어 중원의 패권을 다투던 명나라와의 전투에도 소현세자를 대동했다고 한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당시로서는 최신 문물의 '유통로'였을 서양 선교사들을 소개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소현세자는 많은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그리고 훗날 자신이 돌아가면 조선을 반드시 '부국강병'하게 만들겠다는 맹세를 한다.


마침내 귀국의 기회가 왔다. 그러나 10년 동안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청운의 꿈을 품고 돌아온 소현세자를 기다린 것은 아버지 인조의 의심과 냉대뿐이었다. "혹시라도 저 놈이 나를 밀어내고 청나라의 힘을 빌어 국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신으로 가득한 인조는 결국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만다.

그의 죽음과 함께 실학자들보다도 훨씬 더 이전에 조선의 개화를 꿈꾸었으며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들겠다던 소현세자의 꿈도 사라졌고 나라의 발전도 그만큼 늦어졌으며 결국 남의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아버지 인조의 박해가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소현세자에게는 청나라에서까지 포로생활을 같이 했던 조강지처 강빈이 있었다. 강빈은 소현세자를 도와 조선과 청의 무역까지 도맡았던 여장부이고 조선왕가의 여인으로는 유일하게 조선을 벗어난 사람이며 지아비 소현세자와 그토록 꿈이 잘 맞았던 세자빈이었다.

그러나 아들마저 죽인 마당에 며느리를 그냥 둘 인조가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죽여야 했기에 강빈의 시중을 들던 상궁나인들이 차례로 불려갔고 강빈이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자백을 강요하는 모진 고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그렇다고 답하지 않고 죽음으로 강빈을 지켰다. 그렇게 죽어간 상궁나인이 무려 오륙 명에 이르렀다 한다. 강빈의 인품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인조는 이제 체면이고 뭐고를 따지지 않고 직접 강빈의 사사를 명한다. 그뿐인가! 자신의 친손자이기도 한 소현세자의 세 아들마저도 모두 죽인다.

이런 이야기가 이덕일의 책 '누가 왕을 죽였는가?'에 나온다. 왕세자이면서도 '전쟁포로'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오직 약소국 조선을 힘세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꿈 하나로 버티며 노력해 온 소현세자와 그의 아내 강빈의 짓밟힌 꿈.

나는 서둘러 소현세자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았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꿈이 무참히 짓밟혔던 것처럼 그가 어디에 묻혀 있는 지를 알아내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원당에 있는 서삼릉의 한 쪽. '소경원'에 그가 잠들어 있었다.

일반에게는 공개를 하지 않고 있음을 알고도 나는 무조건 서삼릉으로 갔다. 소경원에 참배하고 소현세자의 넋을 위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토록 금슬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서까지도 함께 하지 못하는 소현세자와 강빈, 그들 부부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무작정 관리사무소장을 찾아 사정했다. 나의 얘기를 다 들은 관리사무소장은 자신도 안타깝다면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는 입장을 설명하셨다. '소경원'은 사적지이기에 문화재청 소속이면서도 농협의 땅으로 사유지란다. 따라서 농협의 허락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한데 지금 '구제역' 때문에 모든 출입이 금지되어 있단다.

또 소경원의 바로 옆은 군부대가 있어 역시 출입하기 위해서는 군부대의 허락도 받아야 한단다. 방금 전에 모 대학의 교수님께서도 학생들과 같이 와 소경원 답사를 요청했으나 그 또한 들어주지 못했다 한다. 요즘 들어 왜 갑자기 소경원을 찾는 이들이 많은 지 모르겠다 하면서….

결국 목적했던 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관리사무소장과 나는 오랜동안 뜻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꼭 묘소에 가서 참배해야만 나의 뜻이 전달되겠는가?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내내 소현세자와 강빈의 명복을 빌었고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우리가 어떤 문화유적을 탐방하는 것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의 의미를 갖는다. 요즘의 시각으로 그것을 보게 되면 결코 많은 것을 볼 수가 없다. 왕릉도 마찬가지이다. '이 곳이 누구누구의 릉'이라는 사전적인 지식만으로는 결코 올바른 탐방이 될 수 없다. 그곳에 잠들어 있는 이의 행적을 통해 그가 이루려 했던 꿈과 이상을 살펴보고 같이 느끼며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심미안이 필요하다.

소현세자의 묘는 경기도 원당의 서삼릉 경내에 있는 '소경원'이다. 그의 아내 강빈의 묘는 경기도 광명에 있는 '영회원'이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나는 소현세자의 묘에서 한 움큼의 흙을 담아 광명의 '영회원'에 뿌려줄 심산이었다. 마치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에 그의 아내 송씨와의 재회를 바라는 소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것 처럼 저승에서나마 좋았던 그 금슬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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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분야는 역사분야, 여행관련, 시사분야 등입니다.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www.refd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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