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상처를 안고 산다

한강의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

등록 2003.10.02 12:08수정 2003.10.0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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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 여자의 열매>
책 <내 여자의 열매>창작과비평사
이 책은 몇 년 전 20대의 젊은 나이에 <여수의 사랑>이라는 단편을 들고 나타났던 신인 소설가 한강의 또 다른 단편집이다. 소설가 한강은 20대의 젊은 여성이라는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전개하는 방법이나 인물 묘사 등의 기법이 뛰어나 많은 주목을 받았었다.

물론 <여수의 사랑>이 순수 문학 파트의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면서, 오랜 기간 소설가로 활동해 온 그녀의 아버지 덕분에 명성을 얻는, 그저 그런 소설가가 아닐까 하는 의혹도 한껏 받았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 첫 번째 소설집은 여성 특유의 깊이 있는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문학적 완성미를 한껏 뽐내며 많은 사람들의 의혹을 불시에 없애버렸다.


<여수의 사랑>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 온 그녀는 이 단편집 <내 여자의 열매>를 통해 한층 더 성숙된 문학성을 내보이며, 그녀의 작품에 대해 은근히 기대해 온 많은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책에 수록된 아홉 개의 소설은 한강의 문체적 특성을 담뿍 느낄 수 있는 1998년에서 2000년 사이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잘생긴 외모와는 달리 온 몸에 화상 흉터가 있는 한 유명 앵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작품 <아기 부처>는 신체적 상처가 마음의 상처까지 만들 수 있다는 단순한 명제를 소설화했다.

그의 아내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가 흉측한 흉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내는 그 흉터를 감싸안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와 결혼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힘들기만 하다. 왜냐하면 몸의 상처가 마음의 상처가 되어 주인공의 마음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늘 강하고 깔끔한 모습을 보이던 주인공은 애인의 변심과 함께 무너져 내리며 울음을 터트린다. <어느 날 그는>이라는 작품 또한 병든 것처럼 창백한 얼굴의 한 여인과 무서운 인상 때문에 늘 경계의 대상이 되는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들의 평범하지 않은 모습은 사랑 또한 힘겹고 어려운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라는 제목의 작품은 한 여자 어린이를 화자로 설정하였다. 이 어린애는 도망간 엄마 때문에 괴로워하며 술을 마시고 난폭한 행동을 하는 아빠 곁에서 늘 두려움과 혼란 속에 사로잡혀 산다. 이처럼 한강의 이번 단편집의 주인공들은 상처가 있고, 그 상처 속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문학 평론가 황도경씨는 이 책에 대한 해설을 덧붙이면서 한강의 소설에 나타나는 상처 입은 인간상에 주목한다.

"사실 한강에게 있어 사람이란 근원적으로 서로에게 낯선 타인일 뿐이며, 따라서 결국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떠나고자 할 때 '너'는 머무르고자 하며, '내'가 슬퍼 울 때 '너'는 웃음이 넘쳐나고, '내'가 이쪽으로 가고자 할 때 '너'는 저쪽으로 가고자 하는 것,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 관계의 숙명인 것이다. 그러나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세계가 만날 때 한강의 슬픈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어차피 세상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 보듬으며 살아가는 공간이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의 상처 속에서 나의 상처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상처를 소독하고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한강의 소설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은 바로 이러한 세상살이의 모습이다.

"아빠의 손가락이 헤집어 놓은 목구멍이 빠근하게 아파 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는 아빠가 밉지 않다. 대신 아빠가 목놓아 울던 모습을 생각하자 가슴이 서늘하게 저며 온다. 그 낯선 통증이 아이의 발을 자꾸만 땅에 끌리게 한다. (중략) 엄마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었을까, 아이는 생각한다. 어린애처럼 들먹이는 아빠의 어깨를 올려다보면서 괜찮아요, 라고 말해주고 싶던, 그 찢어지는 것 같던 마음이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 내용은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의 결말에서 화자인 아이가 술에 취해 엉망이 된 아빠를 보며 혼자 생각하는 부분이다. 어린아이인 이 화자는 결국 아빠의 상처를 알게 모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타인의 상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의 확립은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소설들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이홉 개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은 단편적인 아홉 개의 이야기가 그저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나열된 듯한 그 이야기들 속에도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묘사와 그러한 상처를 감싸안는 따뜻한 인간성에 대한 세밀한 표현이 담겨 있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 소리였으면."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산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상처를 보듬어 주길 기대한다. 또 한 편으로는 자신이 그 누군가의 상처를 감싸안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다. 사랑의 의미가 이처럼 상처를 극복하도록 도와 주고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한강의 소설들은 문학적 틀을 통해 그러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작품이 아닐까?

내 여자의 열매 - 개정판

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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