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잘 모르는 것은 국민이 아니라 최 대표다

[최재천 칼럼] 이라크 전투병 파병은 국민투표가 옳다

등록 2003.10.03 16:43수정 2003.10.0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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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미국 가서 리처드 롤리스 국방부 부차관보 등을 만나본 나도 잘 모르는데, 일반 국민들이 어떻게 알겠느냐." … "지금 국민들의 (파병반대) 여론은 감각적으로 느끼는 반응일 뿐이다."

지난 9월 29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국회 국방위원인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한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파병조건도 모르는 국민에게 (파병 여부를) 맡길 것이 아니라 미국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납득할만한 조건이라면 대통령이 먼저 결심하고 그 후에 국민 설득에 나서야 한다."

같은 날 외신기자 클럽에서 최 대표가 한 말이다.

논란이 일자 해명이 있었다. 최 대표는 "국민을 비하한 게 아니라 대통령이 여론 운운하며 판단을 미뤄서는 안되고 국민에게 더 많은 정보를 주어야 한다는 게 발언의 '진의'였다"고 했다.

파병문제에 대한 최 대표 발언은 무엇이 문제인가

a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 오마이뉴스 이종호

- 최 의원의 경우 현실과 상식에 기초해서 순리적 대안을 찾아나가는 정치인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세상의 변화의 흐름을 타는 측면이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최병렬 의원 "부족한 것이 아니라 없다. 그래서 내가 보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과거에 집착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름대로 현실을 분석적으로 보려하고 남의 얘기를 귀담아 들으려 한다. 그러나 사람이 튀는 사람이 있다. 나는 튀는 사람이 아니라서 현실 중심으로 보고 거기에서 해결을 모색한다."


최 대표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 가운데 한 귀절이다.

보수주의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워낙 여러 갈래이기 때문이다. 미국식으로 보자면 ① 변화에 저항한다. ② 인간 이성을 불신하고 전통을 존중한다 등이 기준이 된다.


최 대표는 분명히 보수주의자이다. 본인 스스로도 자처하고, 이번 발언들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불신'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라크 전투병 파병에 대한 최 대표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국민의 합리적 이성으로는 파병 여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라크 파병 같은 중요한 문제는 국민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통치권자의 결단이 선행돼야 하고, '뭘 잘 모르는 국민'을 설득해야만 한다.

최 대표가 생각하는 대통령은 지난 유신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영도적 대통령' 혹은 '제왕적 대통령'이다. 그렇다. 그는 "세상이 변화와 흐름을 타는 측면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전제로 알권리를 인정한다. 주권자인 국민은 국정에 참여할 권리와 책임을 지게 되는데, 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하게 알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국민에게 파병과 관련된 많은 정보를 주어야 한다는 최 대표의 일부 해명은 옳다. 하지만 비판은 또 여기에서 시작된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갖는 나라이다. 주권자인 국민은 선거를 통해 국회나 대통령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권을 직접 행사할 수도 있다. 전투병 파병과 같은 중요한 국정 현안은 국민이 '직접'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최 대표의 논리는 ① 국민은 뭘 잘 모른다. ② 따라서 파병조건도 모르는 국민에게 파병여부를 맡길 수는 없다. ③ 그러니 미국 등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대통령이 먼저 결심해라. ④ 그런 다음 국민 설득에 나서라. ⑤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결심을 국회에 요청하면 그때 가서야 당의 입장을 밝히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국가이고 국민 주권국가의 여론 형성과 결정은 이와는 정반대로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① 정부와 정당은 공론화된 당내외의 토론과정을 거쳐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여러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하여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② 국민들은 이렇게 해서 제공받은 정보와 자신의 판단을 근거로 공개된 여론 시장에서 여러 갈래의 토론과 학습과정을 거쳐 각자의 여론을 생산해야 한다. ③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라는 명칭답게 국민의 의견수렴에 힘쓰고, 이는 연역적인 방법인 아닌 귀납적인 방법이 되어야 한다. ④ 이라크 파병과 같은 국민적 핵심 현안은 국민투표와 같은 절차에 따라 주권자의 의사를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다. 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내년 4월 총선에서 각 국회의원 후보자나 정당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도록 하고, 주권자의 선택을 통해 심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병렬 대표는 더 이상 국민의 주권을 무시하고 여론을 호도하는 '파병 바람몰이'를 하지 말고 당론부터 먼저 밝히는 게 옳다.

참여정부도 '비참여'를 선호한다?

최 대표뿐만이 아니라 참여정부도 '참여'보다는 '비참여'를 선호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박주현 청와대 국민참여 수석은 "국가 정책의 경우 선거와는 달리 국민들의 판단에 의존하는 식의 투표가 위험 부담이 있을 수 있다"며 "국가 정책의 경우 여론이 중요한 한 요소이지만 전적으로 결정요인이 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이는 어느 선진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헌법은 제72조에서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정한다. 따라서 대통령은 국가의 중요정책에 대해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

학자들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는 국가의 중요정책으로 대개 ① 국가의 장래, 민족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 국기에 관한 사항, 외국과의 통합, 국제기구 가입, 남북통일방안 등의 사항 ② 둘째 국론분열현상이 나타나거나 국민통합의 위기를 초래하는 사항 ③ 셋째 국민전체가 직접 이해관계가 있다고 느껴서 전 국민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사항 등을 들고 있다. 이런 이론에 의한다면 전투병 파병은 당연히 국민투표감이다.

경제적 이익을 근거로 운을 띄우는 김진표 경제 부총리, 곧 건의안을 내겠다며 조기 결정 분위기를 재촉하는 조영길 국방장관, 너무 늦어져선 곤란하다는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파병이 곧 국익이라는 한승주 주미대사의 발언….

이런 식으로 여론을 떠보는 식이 돼서는 곤란하다. 참여정부라는 이름답게 노 대통령은 모든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하고, 직접적인 국민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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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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