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역사, '대구 10ㆍ1항쟁'을 말한다

대한정치학회 추계학술세미나, 10ㆍ1 사건 재조명

등록 2003.10.04 02:41수정 2003.10.0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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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치학회 추계학술세미나 - 10ㆍ1 사건의 재조명
대한정치학회 추계학술세미나 - 10ㆍ1 사건의 재조명허미옥

잃어버린 역사, '대구 10.1 항쟁'. 혹자는 이를 갑오농민전쟁, 3.1운동과 더불어 '3대 민중항쟁'으로 규정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좌익세력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또 다른 측에서는 ‘기아. 학정, 전염병 등 전근대적 요인에 의해 추동된 민란‘이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주 4.3, 광주 5.18 등이 민중항쟁으로 규정되면서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지만, 해방직후 대구에서 촉발된 '대구 10.1항쟁(기자는 이를 ‘항쟁‘으로 기술한다)'에 대해서만 유독 연구와 공개토론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일, 대한정치학회는 2003년 추계학술세미나 주제로 ‘대구 10.1 사건의 재조명‘(전개과정과 영향)을 선정했다. 이날 발표에 참가한 정해구(성공회대)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공개적이고 규모 있는 자리에서 이 문제를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날 프로그램은 건국대 신복룡 교수가 기조강연으로 “1946년 대구사건“을, 제1세션 : 10.1사건의 원인, 경과 및 성격, 제2세션 : 10.1사건이 국가건설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총 4가지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중 정해구 교수가 발표한 “10월 항쟁의 반발과 전개과정“ 을 요약 정리한다. 정해구 교수는 ‘10.1 사건‘에 대한 각계 주장에 대해 꼼꼼한 반론과 더불어 이를 ‘10월 민중 항쟁‘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1946년 10월 항쟁 - 왜 대구에서 시작되었을까?

정해구 (성공회대)교수는 민중항쟁론 차원에서 10월 항쟁을 해석하고 있다.
정해구 (성공회대)교수는 민중항쟁론 차원에서 10월 항쟁을 해석하고 있다.허미옥
정 교수는 10월 항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에 대해 "해방과 더불어 민중이 '기대했던 세계'가 도래하지 않았고, 경찰 등 미군정의 억압 속에서 그것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당시 시대적 상황이었던 식량문제, 생활난 그리고 좌파세력 등의 개입도 일정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0월 항쟁의 배경에 대해 그는 “△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개혁적 요구의 좌절 △ 민중 자치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위원회의 좌절 △ 토지개혁의 지연 등과 함께 △ 미국정의 임기응변적 식량정책과 하곡. 추곡에 대한 강제매입 등으로 인해 일반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항쟁의 시작이 왜 대구였냐는 점이다.


이에 대해 정교수는 “△ 귀환동포의 식량문제와 △ 좌우연합적 연대“를 들고 있다. “해방 이후 집과 돈이 없었던 귀환동포가 희망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자신을 국외로 내몰았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아직도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던 점에 이들은 분노했을 것“이고 특히 “귀한 동포들은 상대적으로 경상도 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에 의한 식량의 강제 매입, 매점매석이 가장 심했던 곳이 대구경북지역이었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식량폭동 일보직전의 상황, 농촌지역에서는 식량반출에 대한 항의, 청송군과 같은 산간지역에서는 아사자가 발생하는 사태“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또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좌우연합적 연대를 통해 미군정의 본격적인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 정교수는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통해 지역 민중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대구지역 좌익들은 10월 항쟁전까지 3차례 좌우합작을 통해 좌익의 역량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켰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9월 총파업이 10월 항쟁으로 연결된 곳은 대구 뿐

1946년 5월에서 10월까지, 정해구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45년 5월 초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미군정의 탄압이 본격화하자 강경 좌익들은 ‘신전술 노선‘을 선택하여 9월 총파업을 일으키게 된다. 9월 총파업은 9월 23일 부산을 출발로 해서, 전국의 전 사업으로 확대되지만 대구지역 파업만이 민중항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서울과 같은 곳에서는 파업이 무력으로 진압되고, 부산과 같이 박헌영 세력이 강했던 지역에서는 파업이 미지근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9월 총파업이 10월 항쟁으로 연결된 곳이 유독 대구뿐이었던 이유는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별 내분이 없었던 대구지역 좌익세력의 조직력과 대구 노동운동의 강력함 때문이었다.

1946년 10월 1, 2일, 그날 대구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었다.

10월 1일 대구에서 약 천여명의 부녀자들 및 어린이들이 대구시청에 몰려들어 쌀을 달라고 항의하고, 이 와중에 군중들을 해산코자 공포를 발사했던 경찰이 1명의 군중의 구타로 중상을 입게 되고, 오후 1시경에는 대구역전에 동맹파업단이 집합하여 남조선 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간판을 걸게 되고, 경찰당국은 군중의 해산을 명했다.

수천명으로 늘어난 군중들은 무장경찰의 철퇴를 조건으로 해산을 거부했고, 오후 5시 30분경 역전에서 운수경찰관과 운수노조 간에 충돌이 발생하고, 이에 출동한 경찰 수명이 군중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게 되고, 군중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의 발포에 군중 1명이 사망하게 된다.

2일, 대구경찰서, 역전, 시청 앞에서는 오전부터 항의시위가 벌어졌고 대구경찰서는 군중들에 의해 점거된다. 또한 역전에서는 경찰과 군중사이에 사격이 시작되면서 양측에서는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상황이 악화되고 대구경찰서가 군중에 의해 접수되었다는 소문에 군중들은 대구시내 도처에서 경찰을 공격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들이 피살되게 된다. 오후 7시경 계엄령이 발표되고, 대구항쟁은 점차 진정되지만 오히려 항쟁은 경북지역으로 점차 확대되게 된다.


10월 항쟁 - ‘좌익 사주에 의한 폭동‘ 설득력 없어

한편, 정 교수는 10월 항쟁이 ‘좌익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고 한다. “파업 및 조직적인 항의 시위에서 좌익들이 중심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의도적으로 경찰을 부추기거나 폭동을 유도한 것이 아니다. 좌익지도부는 직접 나서서 ‘항쟁 자제‘를 촉구하는 라디오 방송도 했다“고 한다.

결국 “자연발생적인 민중 분노의 폭발이 사태의 폭동적 성격을 부여했고, 좌익 역시 자신들의 통제 한계를 넘어버린 상황을 뒤좇아 갔을 뿐“이라는 정 교수는 “민중항쟁의 한가운데에는 일제 때에도, 그리고 해방당시에도 언제나 민중들에게 무력을 휘둘러온 경찰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10월 항쟁을 전근대적 요인에 의한 민란‘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정교수는 반박한다. 즉 그는 “10월 항쟁은 경찰 등 친일파들이 미군정의 후원에 의해 그 지위를 유지해왔고 미군정은 민중들이 기대했던 세상을 부정하고 그들을 억압해왔다. 결국 여기에 식량문제 인플레이션 등 해방 정국의 제반 사회경제적 혼란이 겹치면서 대구에서 일어난 10월 항쟁은 폭발할 수 에 없었던 민중항쟁적 성격이 강하다“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

10월 항쟁은 배고프고 미군정의 학정에 시달려 일어난 단순한 민란이 아니라 ‘해방의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제반 개혁요구가 좌절된 데 대한 민중의 분노‘라는 것이다.

대구지역 언론 - 10월 항쟁을 ‘10월 폭동‘으로 기록

매일신문 2003년 9월 29일 기사
매일신문 2003년 9월 29일 기사매일신문
한때 한국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던 ‘대구‘. 하지만 현재 그 대구는 ‘1당 독재, 보수의 전당, 가장 폐쇄적인 도시‘로 낙인 찍혀 있다. 흔히들 대구의 보수는 “뿌리와 근거가 없는 물에 떠 있는 보수“라고 규정한다.

현재 국사교과서에도 10월 항쟁은 ‘10.1폭동사건‘으로 규정되어 있고. <영남일보 50년사> 제2장 '새로운 시작과 그 역정들' 편에도 이를 10월 폭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정치학회 행사를 기사화 한 매일신문에서는 ‘좌익세력에 의한 동족 학살‘을 기사의 중간제목으로 설정해 놓고 있다.

참 아쉬운 대목이다. 지역사회에서 스스로 이를 ‘폭동‘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잊혀진 역사, 가장 진보적이고 개혁적이었던 대구의 과거를 찾는 작업을 지속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대한정치학회 2003년도 추계학술세미나
10ㆍ1 사건의 재조명 : 전개과정과 영향

● 일시 : 2003년 10월 1일(수) 오후 1시
● 장소 : 대구그랜드호텔 2층 다이너스티홀
● 주최 : 대한정치학회

주제발표 및 토론 : 기조강연 : "1949년의 대구사건" - 신복룡 교수 (건국대)

제1세션 : 10ㆍ1사건의 원인, 경과 및 성격

- 제1주제 : 10월 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 발표 ; 정해구 교수 (성공회대)/ 토론 : 김태일 교수 (영남대)

- 제2주제 : 폭력의 증폭적 연쇄와 이념주의 : 10ㆍ1 사건의 방법론적 재조명을
위한 시론
* 발표 : 안소영 박사 (동경대) / 토론 : 박광주 교수 (부산대)

제2세션 : 10ㆍ1사건이 국가건설에 미치는 영향

- 제3주제 : 10ㆍ1항쟁 : 불완전한 국가폭력 對 국민국가 건설의 정당성을 요구하
는 저항폭력의 충돌
* 발표 : 이창희 박사 (인제대) / 토론 : 백승대 교수 (영남대)

- 제4주제 : 10월 항쟁이 정부수립에 미친 영향
* 발표 : 김일수 박사 (성균관대) / 토론 : 성장환 교수 (대구교육대)
/ 허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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