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된 '젊은 감각'의 시대

김현영의 소설집 <냉장고>

등록 2003.10.07 14:50수정 2003.10.0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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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90년대 소설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는 한없이 고독한 청춘들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맥도날드 햄버거처럼 간편하고 갓 구운 바게트 빵 같은 딱딱한 일상 속에서 헤매는 젊은이들이다.

최근 들어 영화나 드라마, 인터넷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신진 작가들은 그동안 문학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지니고 있다. 때문인지 근래 들어 이 '한없이 고독한 청춘들'은 각종 매체에서 넘쳐나고 있다.


김현영의 <냉장고>는 엄마를 잃고 방황하는 삼수생의 일상을 다룬 소설집이다. 연이은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음료 사업에 뛰어든 후 급작스럽게 유복해진 가정 환경을 못 견뎌하는 '나'. 매일 아침 파출부 아줌마가 사들고 오는 바게트 빵과 커피로 우아하게 아침 식사를 하곤 하는 새엄마, 여자 친구의 생일날 있었던 여러 사건들, 그리고 배경 음악처럼 듣는 팝 음악의 가사는 주인공의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삶의 고리를 형성해간다.

"왜 마음에는 늑골이 없는 걸까? 기타 줄이 다 뭐야. 거미줄보다 더 가는 늑골이 휑 드러난 내 마음을 그녀가 볼 수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나를 위해 주사위를 던져 한 점의 아침식사를 준비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에 대해 연민을 갖기에 나는 너무 강했다. 그녀의 주사위가 아무리 최고의 운만을 점찍는다 해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금방 구워서 속이 축축한 바게트는 여기서 새엄마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주요한 요소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굳어져 버리는 속성은 변변치 못한 실력을 가진 화가이면서도 온갖 고상한 음식들만 냉장고에 가득 채우는 행동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주인공 나는 급체로 죽은 엄마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애정의 근간을 새엄마에게로 옮겨가면서 조금씩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불평대로, 내가 손수 구운 소금에 절인 꽁치구이가 나의 아침식사였다. 나는 오늘도 꽁치구이 한 점에 맹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있고, 그녀는 바게트의 껍데기와 카페오레를 먹으며, 우스꽝스럽게 서로 마주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잔소리를 하지 않는 그녀의 입은 종알대며 열려 있을 때처럼 귀엽지는 않지만 너무 섹시하다. "

우아한 새엄마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애완견 카트린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것은 물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진 듯한 인물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한 감정은 칠백 리터 짜리 냉장고 앞에서 허물어져 버리고 만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냉장고와 내용물의 상반된 대립 관계는 주인공의 시선을 밖에다 던져둔다. <쥬라기공원>의 거대한 공룡처럼 길들여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햄, 마요네즈로 가득 찬 냉장고는 현실적인 '애증'으로 화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것은 즉, 어울리지 않는 이물감이다.

"... 백 원이 남기까지 한다며. 엄마가 지금 그 광고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생각을 바꾸고 나처럼 햄버거를 먹었을까? 그랬다면 지금 저 창 밖의 하늘처럼 흉한 모습을 내게 마지막 모습으로 남겨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못생긴 산모는 애라도 낳지. 엄마는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배만 불렀었다. 뱃속에 몹쓸 것들만 잔뜩 채워 넣어 결국엔 먹어도 먹어도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엄마. 나는 흐린 하늘에 눈길을 던지며 또 이어폰을 꽂았다. "



가세가 기운 집안 형편에서 그나마 소설의 틀을 현실감 있게 직조하고 있는 것은 죽은 엄마에 관한 삽화이다. 자신보다 남편과 아들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는 엄마의 억척스러움은 뒤늦은 성공 뒤에 찾아온 어긋난 '부'의 실천을 뒤바꾼다. 전에 해보지 못한 음식들을 잔뜩 차리는 것이나 기백만원짜리 옷들을 사서 입어보는 행동들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는 곧바로 무가치적 판단으로 자라난다.

무엇보다 김현영의 <냉장고>가 던져주고 있는 문제는, 또 다른 결핍의 이름을 선택하기를 강요하기보다 원초적인 애정의 상태로 회귀하기를 원하는 자아. 그것을 바라는 젊은 감각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신호탄의 의미인 동시에 한없이 고독한 청춘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냉장고

김현영 지음,
문학동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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