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 반 짜리 작업실

겉모습은 남루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등록 2003.10.07 16:51수정 2003.10.0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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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 평 반도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작업실이 생겼습니다. 목조 주택을 짓는 막내 동생이 거의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버려진 목재며 유리 문짝을 이용해 만들어 줬습니다.


작업실은 사랑채 처마 아래에 들어앉혔습니다. 사랑채와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이제는 손만 뻗으면 개울물이 닿을 정도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a 버려진 목재며 유리로 만든 한 평 반도 채 안되는 작업실

버려진 목재며 유리로 만든 한 평 반도 채 안되는 작업실 ⓒ 송성영


한 평 반 짜리, 이 '지상의 방 한 칸'은 머리통이 여물어 가면서 내가 그토록 꿈꾸어 왔던 것이었습니다. 마흔 넷에 그 꿈을 실현시킨 것입니다.

나는 7남매 형제들 중에서 셋째 아들, 누이까지 셈하면 정확히 넷째인데 세상에서 형제하면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위로 두 형과 누나가 있고 아래로는 두 명의 남동생과 누이동생이 있으니 형과 누나, 남동생 여동생,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책상 하나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 시절 다들 그렇게 살았지만 방 세 칸 짜리 집에서 7남매에 아버지 어머니를 합쳐 모두 아홉 식구가 오글오글 생활했습니다. 방 세 칸이 있었다고는하나 두세 평 정도에 불과한 방들이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머리통이 여물고 부터는 작은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거미줄이 쳐진 방이라도 좋았습니다.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관짝 같은 아주 작은 방이라도 상관없었습니다. 거기서 온갖 공상을 하고 능력껏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나만의 방이 처음으로 생긴 것은 87년 무렵,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서울특별시 신림8동, 난곡동 산동네에 달셋방을 얻어 출퇴근했는데 그야말로 관짝 같았습니다. 30여 평쯤 되는 스레이트 지붕 아래 4가구가 세 들어 살았는데 그 중에서 내 공간이 제일 좁았습니다. 보증금 몇십 만 원에 월 5만 원짜리(어쩌면 3만 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두 평 남짓한 방이었는데 비키니 옷장 하나 세워 두고 두 사람 정도가 반듯하게 누우면 딱 맞는 공간이었습니다.


방문을 열면 비좁은 골목길과 곧바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신발을 벗어놓을 자리가 없어 방안에 들여놓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겨울에는 연탄을 땠는데 어쩌다 연탄불이 꺼진 날은 볼 만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벽면 전체가 성에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보여주었던 온통 얼음으로 뒤덮힌 그런 방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버금갔습니다. 벽지가 벌렁벌렁한 방 벽에 수놓아진 성에는 눈의 결정체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웠습니다. 한 동작을 반복하는 고장난 로봇처럼 절제가 안 되는 아래 윗 이빨을 딱딱딱딱 부딪혀 가며 그걸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으니까요.


젊은 혈기로 버틸 수 있었던 난곡동의 방 한 칸은 내가 원하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방이 작고 불편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가져 보았던 나만의 공간이었지만 직장에서 시달리다가 돌아와 시체처럼 쓰러져 잠자는 공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결혼 이후로 늘 나만의 공간은 있었습니다. 연립 주택, 아파트 등의 전세집을 전전하다가 이곳에 정착하기까지 언제나 작업실은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내가 원하는 그런 온전한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온통 시멘트벽에 갇혀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이번에 만든 작업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넓지도 좁지도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꿈꾸었던 그런 공간입니다. 공간은 작지만 밖으로 한없이 열려 있습니다.

a 다 쓰려져가는 사랑채 처마 아래 지어놓은 작업실. 겉에서 보기에는 남루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다 쓰려져가는 사랑채 처마 아래 지어놓은 작업실. 겉에서 보기에는 남루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 송성영


사랑채 한쪽 면이 쓰러져 가고 있어 밖에서 볼 때는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남루하기 이를 데 없지만 방 안에 앉아 있으면 아름다운 풍경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통유리를 통해 밖이 훤히 내다보이기 때문입니다. 통 유리는 건물을 뜯어고치는 공사장에서 얻어온 것인데 16:9에 가까운 비율이다 보니 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화질 좋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거기에는 대나무도 있고 감나무도 있습니다. 저만치 언덕도 보입니다. 사시사철을 그대로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극장입니다.

또 다른 한쪽 면에는 여닫이창을 설치했습니다. 목조 주택을 짓는 막내 동생이 가져 온 이 창문 밖으로는 이끼 낀 작은 바위 돌을 타고 흐르는 개울물이 보입니다. 졸졸졸 물소리가 들리고 개울가 커다란 둥구나무에서는 새들이 종일토록 노래를 합니다.

오늘은 새벽 산행 길에서 만난 구절초 다섯 송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제주도에서 화산재를 이용해 도자기를 굽고 계시는 분에게서 선물 받은 작은 화병에 꽂았더니 썩 잘 어울립니다. 시나브로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을 햇살을 만나 하루종일 활짝 웃고 있습니다.

a 산행길에서 데리고 온 다섯 송이의 구절초가 가을 햇살에 활짝 웃고 있습니다.

산행길에서 데리고 온 다섯 송이의 구절초가 가을 햇살에 활짝 웃고 있습니다. ⓒ 송성영

한 평 반이 채 안 되는 좁은 작업실이지만 당장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 그리고 프린터에 전화기까지 놓고도 얼마간의 공간이 남아돕니다. 남아도는 공간에는 버려진 칸막이 목재를 주워와 CD며 6미리 캠코더 테잎 꽂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좁은 공간이다 보니 영화나 음악 감상하기에도 좋습니다.

그 좁은 공간에 틀어 박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공간은 좁지만 컴퓨터 단추만 누르면 인터넷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보여줍니다. 또한 이곳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컴퓨터 자판 놓는 자리를 이동식으로 만들었기에 네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차를 마시며 좋은 마음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분 좋은 마음을 여미고 돌아갑니다.

지금 나는 한 평 반 짜리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한 평 반을 제외한 모든 공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앞산도 뒷산도 개울도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산과 들이 개울이 누구의 소유로 되어 있든 상관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내가 지금 이 순간, 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내 것이 되니까요.

내가 일상에서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살아간다면 이미 그것은 내 것이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내가 산 하나를 소유한다면 나는 거기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평생 그 산에 꽁꽁 묶여 있어야 될지도 모릅니다. 어떤 것에 눈이 멀게 되면 그것을 제외한 주변의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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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내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때 나는 한 평 반 짜리 이 공간 보다 더 좁은 곳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관 속보다 더 너른 이 공간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공간이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본래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앞날을 장담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커 가는 만큼 필요한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 핑계를 대면서 은근슬쩍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소유하는 만큼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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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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