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민경진 칼럼]

등록 2003.10.08 14:08수정 2003.10.0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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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미래의 사가(史家)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는 무엇을 참고할까요?"

"글쎄요, 아마 신문이나 잡지 같은 것을 텍스트로 활용하지 않겠습니까?"



교양 한국사의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학기를 마무리하며 이런 저런 소회를 나누던 중 제 동기 녀석이 불쑥 던진 질문에 대한 교수님의 답변이었죠.

역사란 당연히 엄밀한 사실(fact)의 재현이란 생각에 젖어있던 대학 신입생에게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이자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에 불과할 뿐"이라는 E.H 카의 주장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캠퍼스에서는 그간의 영웅사관을 거부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중사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역사란 그저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냉소 섞인 시각이 아니더라도 문헌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역사학의 특성상 당연히 지배 계급 위주의 기술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문자를 익히고 값 비싼 종이와 철필을 소유할 수 있는 유한 계층만이 역사를 기록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역사란 어차피 태생부터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기록을 또 다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역사학자가 해석하는 지극히 비과학적인 학문이라는 회의가 들었던 것이죠.

그것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가상 현실에서 깨어난 '네오'에게 도대체 현실이란 무엇이냐고 도전하던 것과 마찬가지 맥락의 문제 제기라고 봅니다. 만약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져 볼 수 있는 것을 현실이라고 규정한다면 현실이란 그저 중추신경에 입력된 전기 신호를 뇌가 해석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선언이죠. 주관적 문헌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역사학 역시 문자 매체의 필터를 통과한 가상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최근 출간한 <바우돌리노>라는 소설에서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순 거짓말을 능숙하게 구사해 내어 뭇 사람들을 홀려대는 희대의 거짓말쟁이 바우돌리노를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어차피 거짓과 상상이 사실과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을 수밖에 없는 서양 중세사를 통렬하게 비꼬기도 했습니다. 역사란 몇 개의 사실과 상상력 여기에 주관적 해석이 가미된 그저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입니다.

1차 걸프전이 끝난 뒤 당시 전투 장면을 위성 생중계해 전쟁의 성격을 다시 규정했다는 평가를 들은 CNN의 테드 터너 사장을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었습니다. CNN의 맹활약을 보도한 <타임>은 커버스토리의 제목을 "지금 벌어지는 역사 - History as it happens" 뽑았었지요. 역사의 기술과 해석이 이제 역사가의 손에서 TV 카메라와 리포터의 마이크로 옮겨 갔다는 상징적인 선언으로 이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미래의 역사가 어떻게 기록될지, 또 참고가 될 텍스트는 무엇이 될지 고민하다 21세기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 틀림없을 지난 해 대선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습니다. 제가 찾아본 문헌은 신문도 잡지도 보고서도 아니고 정치 웹진 <서프라이즈>의 독자게시판이었습니다. TV 3사의 출구 조사 결과가 막 발표되기 몇분 전부터 공개가 된 후 사람들의 반응까지 약 10여분의 숨 막히는 긴장의 시간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게시판 화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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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프라이즈


어떻습니까? 이런 것이 역사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역사일까요? 지지하는 후보의 선거 결과 공개를 앞두고 10여분 간 사람들이 토해 낸 땀과 눈물, 한숨과 환희가 배어 있는 생생한 역사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은 백업 서버에 지금도 안전하게 보관되어 언제든 아마추어 역사가의 열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 눈에는 바로 인터넷에 숱하게 널려있는 게시판들이 바로 "지금 벌어지는 역사"로 보이는군요.

잠시 역사가의 시각으로 돌아가 현실을 보면 최근 의미 있는 변화가 몇 가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카메라 폰의 급속한 보급이 첫째이고 급속도로 늘고있는 컴퓨터 저장 매체의 용량입니다. 이런 속도로 카메라 폰이 보급되고 하드디스크의 저장 용량이 무어의 법칙을 따라 늘어난다면 머지 않아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하드디스크에 저장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아마도 방송사는 수만개의 카메라 폰이 전송해 오는 화면을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로 편집해 뉴스 방송이나 오락 프로그램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죠.

한 사람의 인생이 탄생부터 죽음까지 모두 기록될 수 있다면, 그것도 영상으로 남길 수 있다면 도대체 역사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선 영웅주의 사관은 멸종하고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에서 탄생하는 민중사관의 부활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영웅사관과 달리 수백만의 기록이 더해지는 민중사관이 조작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확률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동전을 몇 번 던질 때는 앞과 뒤의 확률 분포가 들쭉날쭉하게 마련이지만 수 천번을 반복하면 반드시 50:50의 확률로 수렴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죠. 그러니 미래의 역사는 통계학의 확률 분포 곡선에서 탄생하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문헌 위주의 역사가 인쇄 도구를 소유한 계층의 시각으로 심한 편향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21세기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디지털 디바이드" 라는 장벽에 맞닥뜨릴 것 같습니다. 아마도 대량의 컴퓨터와 저장 매체를 보유한 정보통신 선진국에 과도하게 편향된 역사가 기록되겠지요. 디지털 디바이드는 현세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위상을 결정할 것 같군요.

"교수님, 미래의 사가(史家)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는 무엇을 참고할까요?"

15년 전 제 동기 녀석의 질문에 저는 이렇게 답하고자 합니다.

미래의 역사는 통계학자와 데이터 마이닝 전문가들이 기록할 것이고 그들이 참고할 문헌은 데이터 센터에서 발굴해 낸 백업 서버와 하드디스크가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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