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떠난 아들에게 쓰는 편지(7)

사랑하는 아들에게 - 길고 긴 이별

등록 2003.10.10 14:30수정 2003.10.1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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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청명한 가을날이 계속되고 있구나. 먼 옛날, 인류가 불안한 떠돌이 생활에서 안정적인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부터 이런 좋은 계절과 날씨는 사람들에게 풍성한 여유와 흡족한 행복감을 안겨 주었겠지. 그들에겐 오곡이 무르익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백과가 탐스럽게 결실을 맺어 먹지 않아도 흐뭇한 그런 때가 바로 이런 가을철이었을 게다.


들녘에서 다사로운 햇살 아래 통통 익어 가는 대지의 알갱이들, 서늘한 바람의 품에서 단단하게 속살을 채우고 있는 밭이랑의 곡식들, 척박한 산비탈에서 안간힘을 쓰며 마지막 자양분을 갈무리하고 있는 도토리 등속의 열매들, 시골 농가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단 맛을 일구어내기 위해 온 힘을 모으고 있는 과수 나무들, 그렇게 그들 모두 여름 내내 땀 흘려 이루어낸 노동을 서서히 마무리하고 있는 듯하구나.

아들아. 이렇게 좋은 계절의 화사한 날에 넌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느냐. 저 위 어딘가에서 세사에 휩싸여 가엾이 바장이고 있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기는 한 것이냐. 나의 가슴에 고여 푹푹 썩어가고 있는 이 애절한 고통과 아픔을 넌 어찌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느냐. 왜 한 마디 말도 없고, 한 조각 흔적조차 내게 보여 주지 않는단 말이냐. 지극한 마음이면 하늘도 움직이고 대지도 거기에 감응한다는데, 어째서 내겐 꿈에서조차 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지난 5월 15일. 그 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 받는 세종대왕의 탄신일이자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뜻 깊은 '스승의 날'이었지. 해마다 그 날이 되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정성껏 준비한 작은 선물을 내게 수줍게 건넸고, 나중에 스승이 될 그들에게 난 좋은 스승으로 살지 못한 부끄러운 마음을 고백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곤 하는 그런 날이었단다. 그 날은 제자들에게는 스승의 은혜를 상기하고 보답을 다짐하는 날이면서, 스승에겐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그런 날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올해 그 날은 내가 소속된 학과 교수님들이나 학생들, 네가 공부했던 학과의 교수님들과 학생들 모두에게 '스승의 날'을 빼앗아 간 그런 아쉬운 날이 되고 말았구나.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네가 원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와 나를 아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엄청난 불행이 왜 우리들 위에 한 줄기 미친 바람처럼 몰아쳐야 했단 말이냐. 스승과 제자가 단란하게 자리를 함께 해야 할 그 시간을 어찌하여 이리도 야속하게도 박탈해 갔단 말이냐.

그 날 새벽, 반강제적으로 주사 수액을 밀어 넣어 '생존'을 연장한 나는 널 떠나 보내야 하는 막막한 시간을 맞았단다. 10시에 학교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는 의식이 있다고 하더구나.


전 날까지 여러 차례 수사관들이 찾아와 관련 조사를 하고 검시(檢屍)를 하면서 부검 여부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난 단호히 거부했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사람들이 와서 사진 채증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챙겨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담당 검사의 장례 지휘 명령이 떨어졌다고 하더구나. 이런 사고의 경우 그게 없으면 가족들 마음대로 장례도 치를 수 없다고 하더구나.

널 떠나 보내기 위해 염습을 한다고 하는데도 난 미안하게도 네게 가지를 못했단다. 가족들이 그 끔찍한 모습을 보면 내가 어떻게 될까봐 한사코 말리는 데다가 사실 내가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자신도 전연 없었기 때문이란다. 의학을 공부하는 네 막내 여동생이 모든 자리에 입회하여 내 대신 역할을 수행했지.


10시에 대려면 적어도 아홉 시에는 발인을 하여 출발을 해야 하는데도, 우리는 떠날 수가 없었단다. 네가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하게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어떻게 병으로 죽은 사람이나 교통 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처럼, 사후 수습에 관한 아무런 언질이나 보장도 없이 시간이 되었다고 장례에 임할 수 있단 말이냐. 난 가족들과 간단히 상의한 다음, 추모 기념 사업을 중심으로 한 세 가지 조건을 학교측에 제시했는데 학교를 대표하는 분이 거기에 동의를 해 주지 않아 시간은 자꾸 연기되고 있었단다.

내 동료 교수님 몇 분이 부랴부랴 중재에 나서 10시가 다 되어서야 간략한 '합의문'이 만들어졌고, 거기에 양측에서 세 사람씩 연대 서명을 했지. 내가 고약한 사람 같았으면 더 큰 조건을 내걸고 그걸 관철시키기 위해 막무가내로 버텨 영결식 자체를 무산시켜 버릴 수도 있었지만, 네가 가는 마지막 길을 그런 식으로 얼룩지게 하고 싶지 않아 상식 선의 요구만 했던 거란다.

영결식이 예정된 10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겨우 영안실을 떠날 수 있었지. 병원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왜 그리 멀고도 막히던지, 아마도 우리와 헤어지기 싫은 너의 영혼이 길을 가로막고, 억울하게 이승을 떠날 수 없다는 네 마음이 우리들의 뒷덜미를 잡아당긴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한 시간도 더 지난 11시가 다 되어 학교 교문에 들어섰지. 널 만나기 위해 네 엄마와 가끔 드나들었던 그 교문, 우리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문이라고 자랑스러워 했던 그 문, 수위 아저씨가 출입자 신분을 확인할 때 우리 아이가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며 통과했던 그 문, 거기를 이제 넌 싸늘한 시신이 되어 마지막으로 밟고 있고, 우리는 통곡 속에 그 문턱을 넘어섰단다.

학교 전체가 화창한 날씨와는 정반대로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듯 하더구나. 학교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낮은 음계의 장중한 음악이 파릇하게 돋아난 잔디 위를 무겁게 흐르며 적시는 가운데, 네가 매일 숨쉬던 캠퍼스의 공기조차 숨이 막히게 무거운 침묵 속에 착 가라앉아 있는 듯 하더구나.

검은 천에 네 이름과 함께 명복을 빈다는 글이 쓰인 긴 플래카드가 양쪽 나무에 매달려 조용히 바람을 품어 안은 채 흐느끼고 있더구나. 네 자랑스러운 이름이 왜 그 검정 바탕 속에 흰 글씨로 박혀 바람을 맞고 있어야 하는지, 난 그걸 보며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도, 멈출 수도 없더구나.

영결식장인 노천극장엔 참으로 많은 분들이 너를 기다리고 계셨단다. 죄송스럽게도 예정된 시각보다 한 시간이 더 지나 있었지만, 오직 널 위해 바쁜 일 다 젖혀놓으시고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리신 것이지. 간결하고도 정성스레 꾸며진 식장엔 흰 꽃으로 장식된 네 사진이 정면의 제단에 놓이고, 여러 곳에서 보내 오신 조화 20여 개가 좌우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더구나.

식장에 마련된 의자를 다 채워서 그 뒤에 서 계신 분들도 많았고, 처음부터 계단식 관람석에 자리잡고 앉아 계신 분들도 많았었지. 후에 들은 이야기다만 학교에서 치른 영결식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인 것은 학교 역사상 처음이라고 하더구나.

검은 옷을 챙겨 입은 학교 관계자님들을 비롯하여, 학생들, 우리 가족과 친인척들, 그리고 네 친구와 선후배 동료들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너를 맞았단다. 늘 자신을 낮추고 뒤에 서기를 좋아했던 평소의 네 성격이나 성품에 비추어 보면, 널 떠나 보내기 위해 모인 그 많은 분들은 네게 분명 부담스럽고 미안한 일이었겠지. 그러나 아들아. 그게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문턱에서 이승에 남은 사람들이 네게 줄 수 있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인사이고 예의였다고, 네가 다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거라 믿고 싶구나.

학과장이신 권 교수님께서 네 간단한 이력을 말씀하시고, 이어 장례위원장님이신 공학장 좌 교수님께서 흐느끼시면서 절절한 영결사를 읽어 주셨지. 나중에 알았지만 좌 교수님께서는 전날 밤 모친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으시고도 장례위원장이란 직책 때문에 가시지 못해 임종도 하시지 못했다고 하시더구나. 다음에 실험실 대표되는 사람과 후배 학생이 널 보내는 조사를 낭독했는데, 혼이 흩어지고 넋이 나간 듯한 내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를 않더구나.

네게 마지막으로 꽃을 건네는 순서가 시작되었지. 네 엄마와 나는 잘 가누어지지 않는 몸으로 일어나 네 여동생들의 부축을 받으며 제단으로 나가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네 영정 앞에 놓고 다시는 만져 볼 수도, 잡아 볼 수도 없는 네 앞에 쓰러져 마냥 울기만 했지. 사진 속의 네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듯하더구나.

참석한 모든 분들이 긴 시간 동안 네 영령 앞에 꽃을 바치며 애도를 하고 계시더구나. 의자에 앉은 나는 이 기막힌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연신 고개를 가로젓고만 있었지. 주변에 피어 있는 아카시아 꽃이 진한 향기를 소낙비처럼 우리 머리 위에 퍼붓고 있었지만, 내겐 그 꽃송이에 다닥다닥 붙은 꽃망울 하나 하나가 모두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는 것만 같더구나. 어디 그 꽃뿐이었겠느냐. 새로 돋아난 떡갈나무의 새 잎사귀며, 땅바닥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싱그러운 풀잎조차 모두 슬픔에 겨워 잠시 숨결을 멈추고 흐느껴 울고 있는 것만 같더구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을 가리켜 영결(永訣)이라고 하지.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이 이별은 특별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게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정성과 성의를 다해 이 이별의 의식을 엄숙하고 경건하게 치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모름지기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이별은, 특히 다시 만나기 어려운 영결이라는 이별은 몸과 마음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만 같더구나.

아들아. 너를 영결이라는 의식의 이름으로 그 날 그렇게 떠나 보냈지만, 난 아무래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그 길고 긴 이별을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구나. 아니 받아들일 수가 없구나. 기독교인들이 결혼을 할 때 흔히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인간이 어기지 못 할 것'이라고 서약을 하건만, 너와 나의 사이가 어찌 그까짓 죽음으로 갈라질 수 있단 말이냐.

넌 언제나 내 곁에 살아 있는 내 아들이고, 난 네 아버지로서 네 곁에 항상 있고 싶구나. 다시 만날 수 없는 길고 긴 이별이라는 게 있다면, 분명 다시는 헤어지지 않는 길고 긴 만남이란 것도 있지 않겠니. 그 만남의 세계에서 너와 내가 이별의 슬픔이나 고통을 넘어서 눈물도 없고 한숨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아보자꾸나.

아들아. 독일의 어느 시인은 이 가을을 두고 저 햇살을 조금만 더 허여(許與)하라고 기도하는 시를 썼단다. 나도 너를 위해,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몸과 마음으로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 결실과 풍요의 햇살을 더 많이, 더 오래 내려달라고 기도하고 싶구나. 이 가을 햇살처럼 네 영혼이 늘 다사롭고 편안하길 기도하마. 편안히 쉬거라,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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