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방울 범벅으로 만끽하는 가을날의 정취

장마와 태풍이 난리를 쳤어도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다

등록 2003.10.16 12:19수정 2003.10.1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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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 마른 키 큰 옥수수가 가을 하늘을 깊숙히 찌르고 서 있다.
바짝 마른 키 큰 옥수수가 가을 하늘을 깊숙히 찌르고 서 있다.전희식
일손 하나가 아쉬운 추수철, 가을이다. 오죽했으면 갓 젖 뗀 아기도 가을철에는 앞마당에서 새를 좇는다고 했겠는가. 나락을 널어놓은 마당에 날아드는 새들을 본다는 것이다.


어제, 오늘 너무 힘든 날들이었다. 개인 홈페이지에다 일손 구한다고 올려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종일 들에서 살았다. 손이 퉁퉁 부었다. 주먹을 쥐면 꽉 쥐어지지가 않는다. 아마 점심 나절에 애호박을 근 서른 개나 썰어서 말리느라 오른쪽 손아귀가 뻐근했었는데 그 영향이 제일 큰 것 같다.

가을걷이 한창이면 내 하루도 한창이 된다

호박을 썰다 일이 끝이 안 보여 잠시 한 눈 파는 사이 하마터면 손가락을 잘라 버릴 뻔 했다. 엄지손톱만 살짝 날아갔다. 가을 날씨가 좋다보니 뒤늦게 달리는 호박을 이제는 늙힐 수도 없어 계속 따 올 밖에는. 호박부침도 한두 번이지 야들야들한 애호박이 아무리 먹음직스러워도 썰어 말리는 수밖에 없다.

참깨를 털었는데 작년보다 쭉정이가 더 많았다. 햇볕의 몫은 농부가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참깨를 털었는데 작년보다 쭉정이가 더 많았다. 햇볕의 몫은 농부가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이다.전희식
어깨가 아픈 것은 낫질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벽부터 들깨를 쪄내느라고 낫질이 과했다. 근 300평이나 심은 들깨가 거짓말 좀 보태면 3-4년생 감나무처럼 우람하게 자라서 한 그루씩 잡고 쪄내는데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비가 많고 바람이 불어 들깨가 쭉정이만 들었다고 혀를 차지만 우리 들깨는 마침 그 시기에 생장이 늦어 피해가 없었나 보다.

깨알 역시 이것 또한 부풀려 말하자면 콩알만 했다. 아랫집 할아버지가 신통한 듯 내가 일하는 곳에 붙어 앉아서 이게 웬 일이야? 응? 이게 웬일이야 하면서 감탄을 하셨다.

들깨를 쪄내고 보니 이미 다 땄던 옥수수 대에 옥수수가 '솔찬하게' 눈에 띄었다. 무성한 잎사귀에 숨어 있다가 이제 잎이 마르니까 눈에 쉽게 띈 것이다. 다 땄더니 끌차에 가득 되었다.


호박을 썰고 있다. 새파란 애 호박이 지난주에 한 벌 말려 놨는데 밭에 나갈 때 마다 한 소쿠리씩 걷어 온다.
호박을 썰고 있다. 새파란 애 호박이 지난주에 한 벌 말려 놨는데 밭에 나갈 때 마다 한 소쿠리씩 걷어 온다.전희식
이 뿐이 아니다. 그동안 곪아 떨어지기만 한다고 투덜댔던 호박밭에는 호박순들이 시들해 진 사이로 늙은 호박이 누렇게 익어 있었다. 천생 들판에서 쪼그려 앉아 실례하는 아줌마들 엉덩이를 닮았다. 둥그렇게 여기저기 들어앉아 있는 누렁 호박이 군담을 했던 장마철 내 주둥아리를 째려보는 것 같았다. 애호박이 조롱조롱 매 달려 따도 따도 끝이 없었다. 호박 줄기를 들어 올려 흔들어봐서 묵직한 신호가 있는 곳은 호박이 달려 있었다.

콩, 들깨, 호박, 가을 감자, 생강, 밤, 감... 끝이 없다

가을은 가을이다. 아무리 비가 많았고 바람 피해가 있다고 해도 가을은 결실의 계절인 것이다.


콩은 한 이틀 후에 베야 할 것 같다. 생강도 곧 캘 때가 되었다. 가을 감자 심은 것은 아무래도 생장이 늦어 제대로 감자가 열릴지 의문이다. 점심 때까지 들깨 베고 호박도 따고 옥수수도 땄다. 누렁호박은 짚을 몇 단 가져다가 똬리를 틀어 받침을 만들어 주었다.

12시쯤 집에 왔는데 집에 와도 쉴 수가 없었다. 아침은 안 먹는지라 새벽부터 오전에 걸쳐 계속해서 일을 한 시간이 여섯 시간은 넘어 보인다. 다시 신발도 못 벗고 옥수수 벗겨 매달고 호박 썰어 널고 참깨 털었던 것 다시 펴서 햇살에 말리고 하느라 결국 마루 끝에 걸터앉아서 점심을 먹어야 했다. 요즈음 새벽에는 이슬에 젖고 낮에는 땀에 젖고 저녁에는 피곤에 젖는다.

남으치기 옥수수를 다 땃더니 제법 된다. 바지랑대를 만들어 걸어 놨다.
남으치기 옥수수를 다 땃더니 제법 된다. 바지랑대를 만들어 걸어 놨다.전희식
오늘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아랫집 할아버지를 감동시킨 일이다. 내가 들깨를 쪄 내면서 밑동을 바짝 자르지 않고 한자나 위를 자르자 대뜸 한마디 하시려고 막 일어서시는데 내가 먼저 설명을 했더니 깜짝 놀라신 것이다.

깨가 달리지 않은 들깨 대궁 아래쪽은 길게 남겨두고 잘라야 들깨가 빨리 마른다. 남긴 대궁은 발로 눕혀서 밟아버린 후 들깨를 그 위에 깔면 바람도 잘 통하여 깨가 잘 마른다고 설명했더니 감탄을 하신 것이다.

또 하나는 들깨 베는 사이골에 이미 뿌려 놓은 보리씨앗을 보고 놀라신 것이다. 콩밭에도 오늘 밀을 뿌렸다. 마른 땅에 직파를 하는 것인데 들깻잎과 콩잎이 떨어져서 보리와 밀을 덮으면 새 피해도 없이 싹이 잘 나는 것이다. 지지난주 전남 승주군에 사시는 윤원식 선생님의 자연농법 농장을 둘러보면서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방식이었다.

보리나 밀 같은 겨울 작물은 여름철 음식으로 최고다. 찬 음식이어서 밀과 보리를 먹으면 더위도 덜 탄다. 한 겨울에 밀이나 보리를 베어다가 쌈을 싸 먹어도 좋고 데쳐서 나물을 무쳐 먹어도 좋다.

올해는 윤원식 선생님에게서 얻어 온 찰 보리를 심었다. 겉보리보다 찰기가 있어서 먹기가 훨씬 좋다는 것인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종 종자라는 점이다. 할아버지의 뜻밖의 감동에 감동된 내가 약간은 상기되어 주섬주섬 늘어놓는 설명에 할아버지는 맨날 내세우던 80년 농사 인생이 오늘은 쑥 들어 가셨다.

할아버지의 유쾌한 양보(?)

새들이가 1주 단위로 뿌려 주었던 목초액이다. 정농회 여름 수련회에 가서 구입 한 '차코리치 목초액'은 종자 침종때도 사용했는데 발아율이 거의 100%였다.
새들이가 1주 단위로 뿌려 주었던 목초액이다. 정농회 여름 수련회에 가서 구입 한 '차코리치 목초액'은 종자 침종때도 사용했는데 발아율이 거의 100%였다.전희식
요즘은 파종하는 사람 자체가 없지만 밀이건 보리건 골을 타고 흙으로 묻는 화학농에서는 내가 하는 ‘무경운건답직파’ 방법이 무척 생경스러울 텐데도 할아버지는 이제 내가 하는 일에 일종의 호기심 섞인 호의를 보이시는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이 마을에 와서 근 10년간 농사짓는 생활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되면서 그렇게 바뀌신 것 같다. <아궁이불에 감자를 구워먹다>라는 제목의 책에는 아랫집 할아버지도 자주 등장하신다. 지방 방송 TV에도 가끔 나오고 책까지 나오다보니 시골 할아버지가 기가 팍 죽은 모양이다. 그래도 밭두렁에서 일어서시면서 큰소리를 잊지 않으셨다.

“그봐 히시기. 내가 뭐랬어. 엊그제 들깨 베라고 그랬지? 늦었어. 살살 혀~ 깨알 다 빠징게~”

김장채소가 제법 잘 자라고 있다. 목초액 덕이기도 하고 7년 유기농을 통해 살아 난 땅심 덕이기도 하다. 새들이의 정성도 한 몫했으리라.
김장채소가 제법 잘 자라고 있다. 목초액 덕이기도 하고 7년 유기농을 통해 살아 난 땅심 덕이기도 하다. 새들이의 정성도 한 몫했으리라.전희식
해가 설핏하게 기운 뒤에 가마솥에다 호박 썰면서 속 파낸 것하고 방아찧고 나온 싸래기를 넣어 개죽을 끓였다. 새들이에게 불을 때라고 했더니 투덜투덜 하면서 컴퓨터를 끄고 나온다. 들깨 베는 요령은 우리 어머니가 어릴 때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일 못한다고 욕 한 되빡 얻어먹으면서 배운 것이다. 나도 새들이에게 먼 훗날 떠 올려질 좋은 추억거리 하나 안겨 주고 싶다.

낮에는 허리가 휘게 일 하고 밤에는 마당에 전등불을 끌어내 거름자리 쪽으로 쪼그려 앉아 새벽 교회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챙이질을 하신 것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어머니 고유의 헌신이다. 나는 무거워지는 눈까풀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자야 할 판이다.

그렇다. 가을 들녘은 지천에 어머니다. 이젠 팍 꼬시라져 한창시절이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잡초가 그대로 내 어머니 모습이다. 새벽녘 잠자리에서 듣던 어머니의 농사일에 겨운 신음소리도 가을이었고 가마솥이 끓으며 나는 허연 김도 어머니의 백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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