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매, 단풍 들것네"

단풍과 나무가 주는 삶의 소리

등록 2003.10.16 22:00수정 2003.10.1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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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단풍을 보면서 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시를 떠올렸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아주 오랜 사찰의 나지막한 기와지붕에 낀 이끼와 쌓인 낙엽은 세월의 깊이와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작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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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눈이 시리다.
'눈이 시리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시인의 노래를 마음속으로 그리며 가을하늘을 바라본다.

플라타너스의 커다란 이파리가 완연한 초록에서 담백한 색으로 바뀌면서 가을이 깊어감을 알리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기 시작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한번쯤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아주 어린 시절의 가을날이 문득 떠올랐다.
누님들과 두꺼운 책을 한 권씩 들고 뒷산에 올라 단풍이 잔뜩 든 예쁜 나뭇잎들을 책갈피에 하나 둘 끼어 두툼해 진 책을 포개어 놓고 그보다 더 두꺼운 책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어느 책에 단풍잎을 모아두었는지 가물가물할 때쯤인 성탄절을 앞두고는 성탄카드를 만들기 위해 책갈피 사이에 잘 마른 나뭇잎들을 하나 둘 꺼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카드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전해졌다.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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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지리산인지 속리산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가을 단풍이 한창일 때 정상에 올라보니 산아래 펼쳐진 형형색색의 단풍이 어찌 그리도 포근해 보이는지 뛰어내려도 다칠 것 같지 않았다.


대학 초년생이었던 그 청춘의 시절, 이전에 알지 못하던 역사를 하나 둘 알게 되면서 수많은 불면의 밤, 수많은 고민들은 그 가을에도 계속되었다. 일년 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그 곳에는 서 있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때로는 느낌으로, 직관으로 밖에는 느낄 수밖에 없는 것도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갈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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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하나 둘 낙엽이 진다.
그런데 그것이 끝은 아니다. 또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고난의 계절을 보내야 봄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가장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잠시잠깐을 보내다 모든 정든 것들과 이별을 한다. 새 봄을 위하여….

끝이 아니다.

그렇게 자연은 고난의 시간을 준비하면서 하나 둘 자신을 비워가고 있었다.
태고의 자연도 그랬고 지금의 자연도 그렇다.
오직 그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인간을 제외하고 언제나 다른 모습이면서도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자연은 수없이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켜 감으로써 변화되지 않는 신비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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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이미 떨어진 이파리들이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아주 이른 시간.
이들이 밤새워 두런두런 나누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바람이 이들의 두런거리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들을 이렇게 살포시 곁에 내려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새 봄에 새싹을 내었던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은 한편으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삶의 한 자락이여!'

그렇게 내면은 소리치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저렇게 아름다워 본 적이 있는지 돌아보며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이라도 어느 한 사람이 나를 보며 내가 단풍에게 했던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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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참으로 붉다.
새악시의 수줍은 붉은 볼보다 더 붉다.

나무가 나에게 말한다.

"너는 놓아 버린 것들 중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니?"
"......"

그랬다.
내가 놓아버린 것들은 온통 쓰레기요, 더러운 것이었다.
단풍잎을 바라보며 부끄러움에 내 마음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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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듯해서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 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할텐데 그것은 마음뿐이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마음, 예쁜 마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청년시절의 그 꿈은 지금도 내 마음 어디엔가 살아있기는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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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붉게 타다 못해 까맣게 타버린 나뭇잎 하나에서도 자연의 숭고함을 본다.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때로는 속이 저리도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법이리라.

땅은 수많은 물감들을 품고 있다.
그것을 때로는 나무를 통해서 꽃들을 통해서 이렇게 단풍을 통해서 풀어놓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물감들이 들어 있다.
그 물감들이 덧칠이 되면 될수록 어두운 법인데 우리는 하나 둘 우리를 덧칠하며 살아가다가 그 아름다운 색들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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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이젠 저 이파리들을 다 떨궈버리고 나목으로 겨울을 날 나무들을 본다.

병든 나무는 겨울이 되어도 버썩 마른 이파리를 떨궈내질 못한다고 한다.
건강한 나무는 작은 바람에도 자신의 옷을 후두둑 벗어버린단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 내가 옷입고 있는 것, 나를 치장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정녕 나를 사람답게 살도록 만드는 것은 얼마나 되는 것인지.

이 가을에 내가 그토록 붙잡고 있는 애욕의 옷들을 하나 둘 벗어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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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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