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선생님이 저를 울렸습니다

<알쏭달쏭 이웃, 일본에서 살기>

등록 2003.10.17 14:25수정 2003.10.1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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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선생님은 우리 아이의 유치원 담임 선생님이다. 키도 크고, 체격도 크고, 경력도 꽤 되는 베테랑 선생님이다. 그리고 아직 미혼이다. 게다가 유머감각도 뛰어나서 마치 개그우먼 같다. 전체 학부모회의 등으로 유치원에 가면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연신 깔깔 웃다가 돌아온다. 유치원 선생님들의 면면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올해 하야시 선생님이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되어서 난 얼마나 기뻤는 지 모른다.


a 운동회가 끝난 후 아이들에게 메달과 선물 꾸러미를 전달하는 하야시 선생님

운동회가 끝난 후 아이들에게 메달과 선물 꾸러미를 전달하는 하야시 선생님 ⓒ 장영미

그런데 공주놀이를 좋아하는 딸아이는 씩씩한 하야시 선생님 보다 여성스런 작년의 담임 선생님이 더 좋단다. 그 이유는 지난 번 담임 선생님이 더 친절해서라는데 나로선 잘 모르겠다. 내게는 별로 말도 걸지않고 무관심해 보여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에게는 잘해주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겉으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하야시 선생님은 요즘 ‘한국 배우 배용준’에 흠뻑 빠져있다. 여러 기사에도 실렸지만, 지난 여름에 일본 NHK의 위성방송을 통해 ‘겨울연가’가 방영되었고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한창 겨울연가가 방영되고 있을 때 유치원에 갔더니 하야시 선생님이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겨울연가(일본에서는 ‘겨울소나타’라는 제목이었다)를 보느냐고 물었다. 물론 나도 열심히 보고 있던 터라 우리는 설원을 배경으로 한 멋진 영상과 배용준의 미소에 대해 침이 튀도록 얘기했다.

그리고 얼마 전 운동회 예비소집으로 유치원에 갔을 때도 겨울연가 얘기를 했다. 더빙을 맡았던 일본배우의 목소리 보다 배용준의 목소리의 톤이 더 낮고 감미롭다며 대사를 한글로 듣고 싶어서 한글책을 샀다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겨울연가 투어에도 참가하고 싶단다.

내가 그의 새영화 ‘스캔들…’이 요즘 인기인데 좀 야한 장면이 많다더라고 했더니 얼굴을 붉혔다. 12월15일부터 겨울연가가 재방송되어 너무 좋단다. 겨울에 보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번 겨울에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는 선생님은 영낙없는 꽃띠 처녀의 모습이었다.


그런 하야시 선생님이 바로 며칠 전의 운동회에서 날 울렸다. 운동회에서 오후에 아이들 돌보기를 맡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앉아 있는 천막 뒤에서 아이들이 준비하는 것을 돕거나 정리를 하며 또, 다른 엄마들과 수다를 떨며 서있었다.

얼마 후 5세반 아이들의 ‘집단율동’차례가 되어 아이들이 부직포로 만든 조끼와 머리두건 쓰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이들이 입장문 쪽으로 향해 가고 있을 때였다. 하야시 선생님이 두 사람 분의 조끼와 두건을 탁자 위에 펼치고 계셨고 그 앞에 서있던 엄마는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보니 올 1월에 세상을 떠난 유치원의 두 어린 친구 몫의 의상을 펼치고 계신 거였다. 나도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두 친구라면 지금 율동을 하러 나가는 아이들과 같은 반 아이들이었다.

a 하야시 선생님이 먼저 간 두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해적 의상

하야시 선생님이 먼저 간 두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해적 의상 ⓒ 장영미

올해 1월에 각기 다른 이유로 두명의 친구가 세상을 떠났었고 유치원의 모두에게 그 충격은 몹시도 컸었다. 심기일전을 위해 전 원장선생님도 자리에서 물러나실 정도였다.

그러면서 하야시 선생님은‘언제나 늘 옆에 같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항상 옆에서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난 그 말이 너무도 고마워서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부끄러워서 숨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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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그 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되도록 빨리 잊고 싶었고 그러기위해 많이 노력했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않아 알 수 없는 공포와 슬픔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인간에게 망각이 허락된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얼마 전 수퍼마켓에서 아이를 잃은 엄마를 얼핏 본 것 같았는데 다가가 인사를 하지 못했다. 긴가민가 하기도 했고, 우리 아이의 철없는 모습이 혹여 상처를 줄까봐 나서지 못했다. 한편으로 ‘이래선 안되는데’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기가 맡았던 아이들도 아니었는데 하야시 선생님은 그 아이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 두 아이들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저 넓은 운동장에서 음악에 맞춰 멋지게 춤추며 뛰어보라고 거기에 의상을 놓고 가셨다. 하야시 선생님의 덩치 만큼이나 큰 사랑이 거기에 놓였다.

난 눈물을 닦으며 이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고른 사랑을 베푸는 선생님들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하야시 선생님께 아이를 맡길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일본의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면서 사실 꽤 불안했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우리 아이가 혹시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이라도 당할까봐 내심 걱정이었다. 선생님이 편견을 가지고 편애하실까봐 알게모르게 노심초사 했었다. 그러나 1년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다행히 걱정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어를 모르는 것을 걱정하는 내게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애들 하는대로 따라하면 돼요”라며 위로하던 아이의 영특함 덕에, 그리고 좋은 친구들과 이웃들 덕에 불안감은 점점 사라지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유치원의 좋은 점들이 눈에 띄고, 주변 엄마들의 유치원에 대한 자부심이 큰 것을 보면서 나도 신뢰감을 쌓을 수 있었다. 그게 아이를 둔 이방인으로서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 지 모른다.

해적이 되어‘집단율동’에 몰두해 있는 아이를 카메라에 담으며 자꾸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저렇게 열심히 연기하는 아이들이 대견스러웠고, 그 아이들 속에서 아이들 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니는 하야시 선생님이 너무 멋져서 가슴 속에서 자꾸 울컥울컥 솟구쳤다. 두 아이들도 저 속 어딘가에서 함께 뛰고 있을 것만 같았다.

a 해적이 되어 신나게 춤추는 아이들

해적이 되어 신나게 춤추는 아이들 ⓒ 장영미

다음에 한국에 가면 하야시 선생님을 위해 배용준의 브로마이드라도 구해서 갖다 드려야겠다. 얼마나 좋아하실지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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