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에 걸려있는 풍경입니다.김민수
풍경(風磬)은 옛날식 건물 처마 끝에 다는 경쇠로서 작은 종처럼 만들고 붕어모양의 쇳조각을 달아 바람부는대로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풍탁(風鐸)이라고도 합니다.
어린 시절 고풍이 묻어 있는 기와집 처마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풍경은 흔한 풍경이었지만 도시화되면서 고풍어린 기와집들이 현대식 건물로 바뀌면서 우리 주변에서도 풍경은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이제 풍경을 보려면 산사에 들르거나 인사동거리, 아니면 불교용품을 파는 곳에 가야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볼 수 없습니다. 아주 오래된 산사에서 풍경을 만났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은은한 소리를 들려주는 풍경의 소리는 천상의 소리같습니다. 바람부는대로 흔들린다는 것, 우리는 흔히 줏대없다고 생각하지만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자연의 바람이 아닌 세속의 바람따라 살아가는 것은 줏대없는 일이겠지요.
저의 어린 시절은 먹을 것이 그리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오신 날은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막 보릿고개를 넘던 그 시기였기에 부처님 오신 날 절밥의 맛이 기가 막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를 따라 절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하얀 쌀밥에 무채를 얹어 먹었던 절밥은 참 맛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어머님을 따라 모태부터 새벽 예배에 다녔던 나로서는 양심에 찔려서 어머님에게 절에 갔다왔다는 말도 못했고, 아무도 없는 교회에 가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마음 깊이 남아있는 이미지가 두 가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사찰벽면에 그려져 있던 탱화였고 다른 하나는 처마 끝에 달려있던 풍경이었습니다.
'댕 댕 댕….'
이미 오래 전에 들었던 소리였는데 풍경 생각만 하면 귓가에 은은한 풍경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타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마음 편하게 사찰의 탱화도 풍경도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법정 스님의 주옥같은 산문집들을 접하면서 불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혔고, 지금도 저의 서재와 아이들의 책꽂이에는 법정 스님이 아이들을 위해서 새로 각색한 책들까지도 가지런히 꽂혀 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풍경소리가 '댕그렁'거리며 요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날 산사에서 보내 본 적이 없기에 그 소리까지도 은은하게 들릴 것만 같습니다.
가까이 하고 싶으면서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이 풍경에는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풍경은 소박한 것 같습니다. 요란하게 기교를 부리지 않는 붕어의 모양은 부담이 없습니다.
풍경이 주는 소리는 은은하고 평온합니다.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릴 때 조용한 산사를 걸으며 은은한 풍경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평온해 질 것 같습니다.
풍경은 땅을 바라보면서도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조화,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변증법적입니다. 여기와 저기를 동시에 품고 있는 모양새는 깊이가 있습니다. 붕어가 하늘에 떠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늘을 물로 만들어가고, 하늘이 물이 됨으로 속세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조차도 마음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성(聖)과 속(俗)의 조화라고나 할까요?
말만 무성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외향적인 것만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포장문화가 판을 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힘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풍경처럼 은은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바보처럼 살겠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 시대는 바보처럼 살겠다는 사람들이 만드는 작은 희망들로 인해서 여전히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을이 깊고 밤이 깁니다. 이러한 때 마음 한켠에 풍경 하나 달고 쉬엄쉬엄 삶의 여행길을 걸어가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