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검은콩을 거두었습니다

나의 작은 텃밭이야기

등록 2003.10.25 11:02수정 2003.10.2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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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희

올 여름은 예년보다 바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많지 않았던 대신 한 번에 몰아쳐 와서 밭에 심기어 있던 것들을 싹쓸이하려는 듯 기승을 부렸습니다.


저의 작은 텃밭도 예외가 아니어서 폭격을 맞은 듯 토란이며 콩이며 찢어지고 쓰러졌습니다. 아직 여물지 않는 콩깍지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이파리도 없는 콩대를 세우며 그 생명을 이어가기를 기도했는데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뿌린 것보다 훨씬 많이 거두었습니다.

콩대를 뽑아서 가을햇살에 일주일 여 말렸지만 제대로 익은 것이 아니라서 콩깍지가 잘 벌어지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작대기로 콩을 텁니다.

옛날 같으면 마당에 콩깍지를 널어놓았다가 도리깨로 치면 콩알이 우수수 떨어지고, 도리깨질을 하기 전에도 가을 햇살에 톡톡 경쾌한 소리를 내며 콩깍지가 벌어지곤 했는데 그런 맛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잘 마른 콩대를 한줌 집어 막대기로 털다보니 검은콩이 제법 툭툭 튀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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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털고 남은 콩깍지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콩대는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작두로 썰고, 콩깍지는 여물을 만들 때 사용을 합니다. 커다란 가마솥에 콩깍지와 짚을 넣고 장작불로 한참을 끓이면 구수한 냄새가 올라오고, 솥뚜껑을 열어보면 콩깍지에 남아있던 콩이 먹음직스럽게 익어 있었습니다.

뜨거운 김을 쏘이며 하나 둘 고사리 손에 골라 입에 넣으면 콩맛이 왜 그리도 좋은지 콩깍지가 들어간 여물을 만들 때면 늘 가마솥 근처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콩을 털면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를 떠올렸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그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범주에 나 자신도 포함이 되기에 신동엽 시인의 시는 더욱 더 애절하게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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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그렇게 껍데기를 골라내었습니다만 아직 그 안에는 쭉정이도 있고, 돌멩이도 있고, 골라내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머니라면 싸리비로 썩썩 쓸어모아 바람에 쭉정이들과 검불들을 날려버리고, 키질을 '쓰악쓰악'하면 알맹이만 쉽게 골라내실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저에게는 키도 없고, 설령 키가 있어도 제대로 키질을 하지 못할 터이니 바람을 이용해서 골라내고, 조금 시간이 걸려도 아이들과 콩을 고르는 일을 재미 삼아, 교육 삼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별하게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손재주가 있는 편에 속합니다.
전문적으로 배운 것은 하나도 없지만 기타도 칠 줄 알고, 학창시절에는 그림을 그려 몇 번 입선도 하고, 목판화가 한창 유행할 때에는 목판화도 남들보다 쉽게 배웠고, 심지어는 아내가 지점토를 배우러 다닐 때 곁눈질로 이런 저런 지점토를 이용한 물건들도 만들었으니 그런 대로 손재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손재주는 어린 시절 농사를 짓는 부모님들의 일을 재미 삼아 조금씩 도와주면서 익히게 된 것 같습니다. 토끼를 먹이기 위해 꼴을 베러 다니면서 손가락을 몇 번 베이긴 했지만 낫으로 풀을 벨 때 손에 전해지는 느낌, 그리고 가지나 오이를 딸 때 톡톡 소리를 내는 그 작은 느낌들 등등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농사일을 거들면서 손은 거칠어졌지만 손으로 느끼는 일은 쉽게 익숙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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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아이들은 콩 고르는 일이 재미있나 봅니다. 콩을 고르는 아이들을 보며 콩을 골랐던 기억이 좋은 유년의 추억으로 남길 바랍니다. 그리고 쭉정이같은 사람이 아니라 알차게 여문 알곡같은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애들아,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버려지는 쭉정이같은 사람이 있단다. 너희들은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네!"

막내는 열심히 쭉정이를 골라내다 아예 의자까지 갖다놓고 장기전으로 들어갑니다. 두 시간 여를 꼼짝 않고 콩을 고른 여섯 살 짜리 막내의 집중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콩 고르기, 여느 놀이보다 유익한 놀이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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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그렇게 버려질 콩들이 한 곳에 모아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쉽게 버리질 못합니다. 어떻게 지은 농산데 저걸 버리나 하는 생각에 그 중에서 또 골라 한번 물에 불려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밥에 넣어 먹든지 아니면 콩국이라도 한번 해 먹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요.

부모님들이 곡식 한 알, 콩 한 알을 왜 그리도 귀하게 여기셨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곡식 한 알이라도 소홀하게 여기면 죄라고 여기며 사시던 부모님들, 단지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땀방울이 들어간 모든 것들은 때로는 쭉정이라도 마음 아프고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는 궁상맞은 것 같고, 그래서 늘 못 생긴 것만 먹는 것 같아서 싫었는데 어느 새 나도 우리 부모님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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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완결판은 아니지만 이젠 제법 콩같이 생긴 것들이 골라졌습니다. 대략 계산해 보니 한 되 정도 심어서 두 말 정도 거둔 것 같습니다. 태풍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거뒀으면 많이 거두었다고 자족하며 이리 저리 조금씩 지인들에게 보낼 생각을 합니다.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나의 손길이 들어간 작은 정성을 선물하고 싶어서 결국은 가장 실한 것만 보내고 나에게 남는 것은 내년을 위해 남겨둘 씨앗 조금과 못 생긴 것들만 남겨두는 것인가 봅니다.

이렇게 써서 택배를 보낼 생각입니다.

'중국산이 판을 치는 콩 세상에 직접 심고 가꾼 순수 국산 콩을 보내 드립니다. 이 콩은 비록 중국산보다 작고 못 생겼지만 태풍 매미도 이기고 결실을 맺은 콩이기에 몸에 모시면 분명히 여러분들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돈으로 계산하면 얼마 안 됩니다. 그러나 심고 거두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얻은 소중한 것들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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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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