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 일출을 보고 로또복권을 사다

로또 복권과 문어가 가져다 준 행복(1)

등록 2003.10.25 16:07수정 2003.10.2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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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 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중략)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 다 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류시화, 여행자를 위한 서시 중에서-

a 새벽 6시38분 정동진 일출. 동해에서 일출을 보는 것은  전생의 인연이 있어야 한단다.

새벽 6시38분 정동진 일출. 동해에서 일출을 보는 것은 전생의 인연이 있어야 한단다. ⓒ 김정은

새벽 0시 졸음에 겨운 고개를 가까스로 올리고, 이제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드는 거대한 고층 아파트 단지를 뒤로 한 채 자동차는 동으로 동으로, 또다른 어둠의 세계 속으로 미끌어져 가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이 저녁, 길을 떠나는 이유는 무슨 거창한 의미나 예민한 감정의 사치라기 보다는 단지 새벽 6시 38분에 정동진에서 붉게 물드는 일출을 보고자 함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일진대 아무데서나 보면 되는거지 굳이 동쪽, 그것도 정동진에 가서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오늘만큼은 정동진에 가서 해를 맞이하고 싶었다. 비록 정동진에서 보는 해나 서울 고층아파트 창문에서 바라보는 해나 실체는 하나일테지만 담기는 그릇에 따라 달라진다고 정동진에서 해를 맞이하면 왠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같은 예감이 든다.

태양을 내품 안에 넣고 로또 복권을 사다

혹자는 미친 짓이라 할 지도 모른다. 세상이 모두 어둠 속에서 편안한 휴식을 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 말똥말똥 어둠을 헤치고 가는 이 행위 자체가 괴짜 짓이 아닐까?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이 어둠 속을 달리는 이는 나 혼자 뿐이 아니었다. 밤새워 낮새워 24시간 운영하는 고속도로 휴게소 스낵코너도 있었고 나같은 괴짜 손님을 받기 위해 성업 중인 정동진 근처 조개구이 포장마차도 있었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자동차 안에서 해를 기다리는 2시간이 왜 이리 지루한지…. 밖은 이미 새벽의 한기로 쌀쌀하고 자동차 안은 훈훈한 히터의 열기 속에 잠을 부르는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오지만 잠은 안 오고 눈은 점점 말똥말똥해지는게 아마도 밤을 꼬박 새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시간이 되어 바다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기 위해 해맞이 공원으로 갔다. 오늘은 날씨가 맑으니 일출을 볼 수 있으리라는 소문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 순간 만큼은 그네들이나 나나 오로지 해가 뜨기만을 기원하는 한 마음이었다.


어느덧 주위 바다 색깔이 붉어지기 시작하고 주위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바다색마냥 사람들의 얼굴도 기대감을 안고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붉다 못해 터질 것같은 바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붉은 덩어리를 토해내는가 싶더니 어느새 모습을 보인 태양은 바다 위에서 서서히 위로 위로 솟구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 내가 정동진만 10번을 와봤지만 늘 날씨 때문에 해돋이를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멋진 일출을 보니 소원성취한 것 같아"

멋진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것, 특히 동해에서의 일출을 보는 것은 전생의 인연이 있어야 한단다. 그렇다면 그동안 여기저기서 일출을 봐았던 터라 그저 그곳에만 가면 늘상 일출을 볼 수 있으려니 하고 생각해왔던 내가 문득 억세게 재수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재수 좋다는 생각은 별로 한 적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재수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 해돋이가 고마워 이 행운을 이어가고자 공원 옆 25시 편의점에서 로또 2000원 어치를 샀다.
'만약 이 행운이 로또복권으로 그대로 이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설령 로또 복권이 꽝이 된다 하더라도 나쁠 건 없다. 짜릿한 기분 그대로 주말을 보낼 수 있으니 그 또한 행복한 일이 아닌가?

일출과 로또로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힐 겸 정동진 근처 '등명 락가사'에 들러 철분이 많이 함유된 시원한 약수 한사발을 마신 다음 대포항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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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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