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쓸쓸함 가득한 시골 노인들의 가을걷이

[시골마을 가을걷이 풍경 3]시골에 한번 다녀올까?

등록 2003.10.26 08:37수정 2003.10.26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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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
곶감김규환
낙엽 폴폴 날리고 밤새 무서리 내리면 거둘게 많아 바쁜 농촌


날이 꽤 쌀쌀하다. 이제 절기로 상강(霜降)도 지났다. 무서리가 밤새 하얗게 내렸다. 두꺼운 옷도 이젠 무겁지 않다. 낙엽이 힘없이 떨어져 사방에 휘날리니 곧 거리는 허전하게 텅 비겠지. 마음은 이미 겨울이다.

은행잎 노랗고, 느티나무 붉어지고, 단풍은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담쟁이는 벌써 붉어서 말라비틀어지고 있다. 들국화는 수많은 씨를 머금고 홀씨로 날릴 준비를 한다.

감 홍시는 서리맞아 더 빨갛다. 아이들과 껍질만 살짝 건드려 벗겨 죽보다 맛있는 차진 홍시 하나 그릇에 담아 숟가락으로 떠먹고 싶다.

고향마을 느티나무도 붉게 물들었습니다.
고향마을 느티나무도 붉게 물들었습니다.김규환
계절의 변화 앞에 나는 거둘 게 있는가?

계절의 변화는 이렇게 단순하다. 겨울에서 봄으로 왔다가, 꽃피더니 지긋지긋한 비와 무더위로 여름을 힘들게 하였다. 그래도 감내하고 살았다. 이젠 낙엽 풀풀 폴폴(fall fall)날리는 가을이다. 이 때만 잠시 가을일 뿐 곧 겨울이 다가온다. 어김없이 또 찾아와 다음 일거리를 주니 잠시도 한눈 팔지 못하게 하는 계절감은 부지런한 사람 아니면 느끼지 못한다.


나는 지금 거둘 게 과연 무엇인가? 나는 한 해를 알차게 보냈는가? 세상에 떠밀려 이리저리 휩쓸려 살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여물이 들어 고개 숙일 준비를 차분히 해왔는가?

서리내린 백아산 아랫마을의 찔레 잎
서리내린 백아산 아랫마을의 찔레 잎김규환
가을날 촌로는 마음만 바쁘지 늘 제자리걸음이다. 언제 한번 허리 펼까?


오늘도 고향마을 촌로(村老)는 아이들이 입다 보내온 해진 옷을 두껍게 걸쳐 입고 바삐 들길을 오간다. 굽은 허리가 땅에 닿을까 염려스럽다. 끼니나 챙겨 드시고 움직이시는 건가?

참깨, 들깨 거둔 지 오래지만 아직 시골 노인네는 거둘 게 많다. 늙다만 까만 호박 "똑똑똑" 썰어 바위, 평상에 널어 말린다. 무말랭이도 준비해야지, 아주까리 잎도 묶어 처마에 매달아야 한다. 숨돌릴 틈도 없다.

호박 썰고 있는 장면, 언제 호박고지 얻으러 갈랍니다.
호박 썰고 있는 장면, 언제 호박고지 얻으러 갈랍니다.김규환
그래도 짬을 내어 한 숨 돌리지 못하는 것은 이나마 있어야 기나긴 겨울을 날 수 있으니 도리가 없다. 예전 같으면 손주며느리 밥상 받아가며 곰방대에 뻐끔뻐끔 담배나 피워댈 때인데 목숨만 길어졌지 호강하리라던 기대와 시절은 영영 오지 않으려나 보다.

밭곡식 거둬 봉지에 차곡차곡 싸서 담아두고 늙은 호박 따서 윗목에 차곡차곡 포개 놓는다. 메주콩 두어 말, 검은콩 서너 되, 팥 닷 되, 들깨 두 말, 참깨 반 말, 동부콩 네 되, 진저리콩 한 말은 각기 몫이 있다.

내 어머니도 살아계셨으면 이렇게 되셨을까?
내 어머니도 살아계셨으면 이렇게 되셨을까?김규환
아들, 딸 몫 정해가며 힘내시는 우리들의 어머니

흰콩으로 메주를 쒀서 된장을 만들어 올적마다 한 통씩 나눠주리라. 검정콩은 당뇨 앓고 있는 둘째 아들에게 전부 보내기로 되어 있다. 팥은 동지팥죽 좋아하는 큰딸에게 보낼 참이다.

들깨, 참깨로 기름을 짜서 각각 사이다 병에 담아 보낼 오진 생각에 힘겨운 줄 모른다. 동부콩은 밥에 올려 먹으라고 서너 홉씩 나눠줄 생각이다. 진저리콩은 시루에 콩나물이나 몇 번 길러 먹으면 긴 겨울 나물 걱정 끝이다.

행여 한 톨이라도 잃을까 두려워 침침한 눈을 부릅뜨고 콩알 찾는 할미의 손은 이제 거북 등보다 더 까칠하고 장작개비보다 딱딱하다. 저 붉은 감을 몇 개 따 놓으면 좋으련만 간지대 들 힘마저 없으니 이를 어쩔거나.

'가을볕은 며느리 몫'이었다. 이젠 이 노인 차지가 되었다. 지리산 뱀사골보다 더 움푹 팬 얼굴엔 땀이 고여있다. 벼 거둬 기나긴 한겨울을 준비하는 농부의 하루는 짧기만 하다. 어이 쉬 떨어지는 해를 탓하랴.

고구마를 캐 놓기는 했는데 그 무거운 것을 어찌 실어다가 아이들에게 부칠까 걱정이다. 배추포기 잘 들라고 지푸라기로 묶어주는 일은 내일로 미뤄야할 모양이다. 침침한 눈으로 어느새 곶감을 깎아서 실에 꿰어 널어놓은 바지런한 솜씨가 놀랍다.

서리 맞지 말라고 미리 따서 놓고...
서리 맞지 말라고 미리 따서 놓고...김규환
잊혀진 고향마을과 노인들

먹고사느라 바쁜 시절이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으니 늘 마음만 무겁다. 추석 때 잠시 찾아 뵈었을 뿐 "또 올테니 건강히 계세요" 하고 떠나왔다. 마음속으로 자주 찾아 뵙겠다는 다짐은 이제 하찮고 너덜너덜한 휴지조각이 되었다. 미안한 마음만 차곡차곡 쌓이니 근심만 깊어간다.

이러는 사이 잊혀진 동네, 잊혀져 가는 시골, 아무도 관심 쓰지 않는 농촌의 가을밤을 홀로 견디시는 노인과 고향집은 더 스산하다. 사람이 살아야 개라도 짖을진대 오가는 이 없으니 더 이상 누렁이의 "컹컹" 우렁차게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먼데로 소풍갈 시간, 밖으로 나가 여흥을 즐길 시간은 내도 혼자 사시는 어르신 찾아 뵙기는 쉽지 않으니 그 시골을 묵묵히 지키는 하루하루는 고단하기만 하다. 다음주에 처가에 다녀와야겠다.

키와 팥
키와 팥김규환
국산 햇콩
국산 햇콩김규환
아주까리 또는 피마자잎
아주까리 또는 피마자잎김규환
고구마 상자에 담는 것 까지는 하겠는데...
고구마 상자에 담는 것 까지는 하겠는데...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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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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