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끝자락, 해안도로에서 만나는 여름

뒤돌아보며 걷는 '해안도로'의 인생질주

등록 2003.10.28 18:28수정 2003.10.2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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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 신호대기 앞에서 출발이 늦었더니 뒤차가 '빵빵'대기 시작한다. 만약 여기서 다시 한발만 더 늦추게 된다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3-4대의 차가 경적을 울리며 난리를 칠 것이다.

출근길 아침, 가로수의 낙엽이 자동차의 앞 유리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하마터면 길에서 봉변을 당할 뻔했다. 물론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에게 계절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a 한폭의 그림처럼

한폭의 그림처럼 ⓒ 김강임

어떤 이는 가을이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이유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 색깔이 빨갛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 빨간색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떠나는 길. 하귀-애월까지의 해안도로의 드라이브였다.

학생들의 고민보따리를 들어주기 위해 가는 출근길은 언제나 북새통이다. 시원스레 펼쳐진 도로 위에서 저마다 페달을 밟고 달리는 인생질주. 1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곡예사처럼 추월하는 풍경은 마치 마술사 같지만 아찔하다.

a 돌틈에 피어나는 억새속으로

돌틈에 피어나는 억새속으로 ⓒ 김강임

하루쯤은 마음에 여유를 부리며 더디 가는 길을 선택해 보자. 그 길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은 힘겹게 지나온 지난 여름이다.

제주시내에서 12번 서회도로를 타고 하귀에 다다르자 '해안도로' 표지판이 눈에 띈다. 여느 때 같으면 훤하게 뚫린 빠른 길을 선택했건만, 바다 길을 선택한 이유는 '서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귀 바닷가 마을 가문동 입구. 말의 어감도 정겹다. 가문동 입구에서 시작되는 해안도로는 바다를 옆에 끼고 끝없이 이어진다. 돌 틈에 피어 있는 억새의 물결이 환상적이다.


a 꼬불꼬불 길을 따라

꼬불꼬불 길을 따라 ⓒ 김강임

모두가 빠른 길을 선택해서인지 해안도로는 한적하기만 했다. 가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달렸던 이 길은 항상 마음속에 간직했던 고향과도 같은 길이다.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80-100km를 밟아야 했지만, 이 길에서는 40-50km를 밟고 느리게 달려도 괜찮다.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겠지"하며 이해를 하기 때문이다.

느리게 간다고 눈을 흘기는 사람도 없고 경적을 울리는 사람도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옆에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바다처럼 넓은 아량과 이해가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게다.


눈에 띄는 것이 쪽빛 바다풍경이지만 너무 바다에 매혹되어서는 안 된다. 가능하면 차선을 지켜주는 것이 뒷사람에 대한 배려이며, 상대편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지켜야할 예절이다.

a 갯바위에는 아직 여름이 남아있다.

갯바위에는 아직 여름이 남아있다. ⓒ 김강임

얼마쯤 달렸을까? 갯바위가 보인다. 지난밤 내렸던 찬 서리에 몸을 움츠리고 나온 강태공들의 모습이 보인다. 참 성질도 급하다. 지나 여름을 불야성으로 태웠던 밤바다를 생각하면 강태공들이 왜 이곳을 아직도 떠나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갯바위에 걸터앉아 가을을 낚고 있는 사람들 뒤에는 여름이 보인다. 가을로 가는 끝자락에서 보이는 여름은 겸손하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자연재해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우리들에게 꿈과 희망을 실어주었던 계절이었지 않은가?

a 고내리 오르막길에서

고내리 오르막길에서 ⓒ 김강임

고내리 바다는 코발트색이다. 지역을 알리는 돌 표지석이 조금은 추워 보인다. 세찬 비바람에도 변함없이 마을과 바다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 같은 돌 표지판이 장군처럼 보인다.

a 포구에 떠있는 고깃배

포구에 떠있는 고깃배 ⓒ 김강임

고내리 포구에 다다르자, 바다로 이어지는 방파제가 있다. 좀더 여유를 부렸더라면 차에서 내려 방파제까지 걸어볼 수 있었을 것을. 차창 문을 열고 바다 냄새만 맡으며 다시 페달을 밟는다. 그나마 서너 척의 고깃배들이 한적한 포구의 풍경을 지켜줌에 감사함을 느껴본다.

구엄, 신엄, 중엄.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좋겠다. 자연이 이들에게 모든 걸 다 줄 수 있으니, 정말이지 축복 받은 사람들만이 이곳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a 다락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락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 김강임

다락쉼터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는 차마 그냥 달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차를 갓길에 주차시켰다. 해녀 상이 다락쉼터를 지키고 보호하고 있다. 가로등도 드라이브 길에서는 소품처럼 느껴진다. 다락쉼터 뒤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희미하게 보이는 바다 건너에는 내가 가야할 세상이 있다.

그곳으로 가자. 그곳으로 가서 아이들의 고민보따리를 들어보자. 항상 자신의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아이들의 고민까지 들어주는 내 자신이 어느 순간에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a 정자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정자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 김강임

그런 내 마음을 달래는 것은 제주바다였다. 지나온 길에는 정자가 서 있다. 벌써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모두가 바다만 바라본다.

"저들은 지난 여름 무엇을 잊어버렸기에 저렇게 바다에 연연하는 것일까?"

정자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지나가는 계절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난 여름 무성했던 파란 잔디가 누렇게 변해갔음에 벌써 무상함을 느껴보는 순간이다.

a 애월항에서 저마다의 신호를 받고

애월항에서 저마다의 신호를 받고 ⓒ 김강임

쫓기는 마음을 '서행'으로 다스리고 다다른 곳은 해안도로의 종점 애월항이다.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애월항에는 다시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신호등이 있다. 물론 그 신호등은 사람마다 다르다.

총총 걸음으로 달려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뛰어 가야 할 길이 있고, 느리게 걸어야 할 사람에게는 다시 뒤돌아 가는 길도 있다. 다만 한 발 쉬어 가며 느긋함을 배우는 여유. 자신이 뒤돌아온 계절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길이 여기 있을 뿐이다.

a 바다위에 떠있는 카페에서 차한잔 나누지 못함이...

바다위에 떠있는 카페에서 차한잔 나누지 못함이... ⓒ 김강임

그래도 해안도로 드라이브 길에서 여유를 부리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아있다. 그것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UFO의 카페에서 차 한 잔 느긋하게 마시기 못하고 달려왔던 것. 그것은 못다한 숙제처럼 마음에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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