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서류 봉투 찾아가세요

등록 2003.10.29 00:58수정 2003.10.2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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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 아침은 이른 외출 준비로 분주합니다. 9월부터 시작한 다른 장르의 글쓰기를 위해 아침 잠을 물리치고 행복한 생각을 가득 모아 출근 전쟁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지하철 6호선에서 시작해 3호선으로 갈아타고 먼 길을 늦지 않으려고 조바심치는 날이긴 해도 다시 무언가에 희망을 걸고 가는 길이니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니 참을만 합니다.

지하철 계단을 씩씩하게 뛰는 사람들 사이에서 같이 뜀박질도 하고 어깨너머로 신문 기사도 검색합니다. 옥수동 한강 물에 넋을 잃고 누군가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앉아 있는 사람보단 서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지하철의 아침은 모두가 피곤해 보입니다. 얼굴 표정은 엄숙하고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억지로 깬 잠을 자야 하는 고단한 일상들이 그대로 멈추어 있는듯 해 보입니다.

앉은 사람들 중에는 눈을 뜬 사람보단 감은 사람이 더 많기도 했던 3주 전 화요일 아침 3호선을 타고 가던 중에 본의 아니게 서류 봉투를 하나 주워야 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앞자리에서 눈을 감고 있던 남자 분이 '충무로' 역이라는 방송을 듣더니 문이 닫힐 무렵에 갑자기 일어나 달려나가면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내 앞에 떨구고 갔습니다.


순간적으로 놀란 시선이 모아졌지만 통로에 떨어져서 누군가는 주워야 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워서 살펴보니 모 화재해상보험회사에 근무하는 분의 서류였습니다.

꽤 많은 고객들의 신상이 적힌 서류와 보험증서, 보험청약서까지 한 눈에 보아도 중요한 서류였습니다. 내릴 역을 지나칠까봐 정신 없이 뛰어 나가던 서류봉투 주인의 뒷모습이 안쓰럽게 떠올랐습니다. 중요한 서류를 분실해서 상심이 얼마나 클까 걱정까지 해 가면서 연락처를 살펴보았습니다.


다행히 개인 연락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신호가 한참 울린 뒤에 들려온 것은 착신 금지라는 황당한 메시지 였습니다. 다시 회사 대표 전화로 전화를 해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고 수업이 12시에 끝나니 그때 다시 통화할 수 있다고 제 연락처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1시가 지나도록 전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충무로 역을 지나고 나니 전화가 왔습니다.

본인은 어제 다른 사람에게 서류를 맡겼는데 그 분이 술 마시고 잊어버린 모양이라고 아침 상황과는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내가 있는 곳을 묻더니 그럼 그곳 가까이 사시는 분을 소개해 줄 테니 전달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가까이 사신다는 분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급한 서류가 아니냐고 묻는 내게 급한 것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고마워서 소주라도 한 잔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그런 대화를 나눈 지 3주일이 지났습니다. 서류 봉투의 주인은 엄청난 숫자의 고객들을 잊어버렸는지 감감무소식입니다.

너무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신상명세서를 얼핏 보면서 내 맘이 빚진 죄인처럼 무겁습니다. 영업하시는 분들의 노고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다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무책임해 보입니다.

다른 데에 잘못 사용할 수도 있는 특정 다수의 명부를 가지고 있는 저는 쓸데없는 짐 하나를 얹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전화해서 찾아가라고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하철에서 습득했으니 지하철 분실물 센타에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연례 행사를 치르듯 지갑을 분실하곤 하는 저는 잃어버린 당혹감과 상실감에 몸서리를 치며 누군가 되돌려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불필요하지만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되돌려 준다면 얼마나 감사할까 그런 생각으로 서류 봉투 주인을 기다렸던 3주일은 참으로 착잡했습니다.

소용돌이를 만들며 불던 바람 따라 낙엽들이 혼란스런 춤을 추던 것만큼이나 답답합니다. 물건을 주워 주인을 찾아 주는 일도 싱거운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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