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홍시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3.10.30 08:09수정 2003.10.3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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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박철

이틀 전, 세찬 바람으로 감나무가 몹시 흔들렸던 모양이다. 오늘 아침 동네를 돌아보니 감나무 이파리들이 거의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 사이로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가을걷이가 바빠서 감을 딸 시간이 없는가 보다. 감나무의 노란 감들이 그 어떤 가을 풍경보다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감을 따지 않고 가만 놔두면 저절로 홍시가 된다. 장대 끝자락에 그물주머니를 달아 감을 비틀어 딴다. 찬 서리에 홍시가 된 감은 시집가는 처녀 볼처럼 붉다. 그 맛이 기가 막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감이다. 감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단감도 좋고 소주를 부어 떫은 맛을 없앤 침수도 좋고, 홍시는 말할 것도 없다.

처가 쪽은 감이 많이 나는 경북 영주이다. 예전에는 서울에 사시는 장인 장모께서 직접 고향까지 내려가셔서 감을 따 오셨다. 내가 감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시고 감을 나무상자에 담아 해마다 소화물로 부쳐 주셨다.

느릿느릿 박철

장모님은 몸이 재셔서 감나무에 올라가 장대로 감나무 가지를 후려치면 장인 어른은 떨어지는 감을 나무 아래에서 받으셨다고 한다. 소화물 센터에서 감 상자를 찾아오면 아내는 감을 먹으며 부모님 사랑이 고마워 눈물을 흘렸다.

잘 무른 홍시를 서늘한 광에 두었다가 출출할 때 하나씩 꺼내 먹는 맛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속을 편안하게 해준다.


내가 감을 좋아하니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가 나를 닮았나 보다. 앉은 자리에서 제 주먹보다 큰 홍시를 일곱 여덟 개를 후딱 먹어 치운다. 그래도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매년 이맘 때 장인어른이 보내주신 홍시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 5년 전, 장인어른이 중풍으로 쓰러지신 이후로…. 그리고 3년 전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가셨다. 나는 감을 먹을 적마다 장인 장모님을 생각하게 된다.


지난 월요일 오산에서 내가 평소 존경하는 분들과 친구를 만나고 그 다음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람이 몹시 불었지만,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아침이었다.

나는 가을 풍경에 취해 차에서 내렸다. 마침 부부인 듯 한 두 사람이 장대로 감을 따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서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팔지 않고 먹을 것이라는 걸 한사코 떼를 써서 반접을 샀다. 감도 감이지만 이들 부부의 훈훈한 정을 맛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박철

이들이 감을 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불현듯 다가오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잘 익은 홍시 같은 사람인가?”
“떫고 풋내 나는 아직도 덜 된 사람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의 경우가 내 모습이었다. 잘 익은 홍시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간단한 뉘우침이 든다.

오산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서울 외곽순환도로 해서 집으로 가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계속 서울 방면으로 직진을 했다. 장모님이 뵙고 싶었다. 지금 장모님은 방광염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계신다. 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깜짝 놀라신다.

“아니, 박서방이 아무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래?”
“네, 그냥 왔어요.”

몇 년 전 만 해도 작지만 단단한 체구로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시던 분이 팔십 노인이 되어 구부정하게 침대에 앉아 계셨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하얀 쌀죽이 나왔는데 절반도 잡숫지 못하신다. 내가 잠시 머물다 장모님을 위해 기도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자 말씀하신다.

우리 장모님 권채봉 여사. 올해 79세이다.
우리 장모님 권채봉 여사. 올해 79세이다.느릿느릿 박철

“박서방, 정말 고맙대이.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을 보니 참 좋네.”
“어머니, 건강하세요. 퇴원하신 다음 또 오겠습니다.”

상강(霜降) 지나 오늘 아침,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고추밭이 서리를 맞자 폭삭 시들어 주저앉았다. 우박이 쏟아져 배추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무성했던 여름이 가고 가을도 가고 겨울이 오고 있다. 그 싱싱했던 이파리들이 다 떨어져 버리고, 뭇 나무들이 동면의 계절을 향하여 나신(裸身)이 되어 가고 있다. 그래도 노란 감들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 진다.

가는 세월을 붙잡아 둘 수 없고, 사람도 쉬 늙어간다. 그러나 내 인생의 끝자락에 나는 잘 익은 홍시 같은 무르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떫은 맛과 풋내도 가시고 좋은 맛을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디까지나 욕심일는지 모르지만….

느릿느릿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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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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