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총장님, 소 잡는 칼로 닭 잡겠다고요?

언론의 받아쓰기와 평준화에 대한 오해

등록 2003.10.30 20:29수정 2003.10.3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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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운찬 총장
서울대 정운찬 총장오마이뉴스 이종호
대한민국 최고 학부인 서울대의 총장님이 지난 28일 '평준화'에 대해 다시 한 마디 하신 모양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한국은행 직원들 100명 앞에서.

<조선일보> 29일자는 그 내용을 다음처럼 전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28일 고교 평준화 제도의 폐지를 거듭 주장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지방부터 중고교 입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 총장은 이날 오후 한국은행 임직원들 100여명을 대상으로 행한 특별강연 ‘한국의 미래와 교육의 비전’에서 '고교 평준화는 평등을 통한 불평등의 고착화이며 한국의 사회 이동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정 총장의 발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서울의 인구는 전국의 25%인데 서울대생의 40%가 서울 출신이고, 특히 경제·경영·법학 등 3개 인기학과의 경우 60%가 넘는다. 그것도 서초·송파·강남구 등 강남권 3개구에 집중돼 있어 갈수록 계층 간의 이동을 가로막고 있다"(<조선일보> 기사 재인용)

'평준화 폐지론'에 힘을 보태주는 그의 이 같은 말은 벌써 10월 들어서만 두 번씩이나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29일자 일간지에는 온통 정 총장 얼굴과 기사들이 지면을 장식했다. <동아일보>, <한겨레>, <세계일보>, <한국경제>, <매일경제>, <경향신문> 등은 모두 그의 발언을 3단 또는 박스 기사로 크게 다뤘다. 그가 한국은행 직원들 앞에서 벌인 '평준화 폐지와 고교 입시 부활 강연'을 그대로 중계한 셈이다.

보도를 보면 정 총장의 평준화 폐지론의 근거는 색다르다. "(평준화가) 갈수록 계층 간의 이동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조선일보>가 4일 전인 24일자에 보도한 내용과 일치한다. <조선일보>는 평준화 폐지를 위한 시리즈인 '고교평준화 30년'이란 특집기사에서 다음처럼 '서울대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


"작년 강남구 소재 고교 졸업생들은 전국 평균보다 3.5배, 서울 시내 다른 구(區)보다 평균 2.3배, 많게는 30배나 서울대에 많이 들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서울대가 최근 분석한 결과로, 서울대가 한 해 입학생들의 출신지를 이같이 전수 조사·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일보>보도와 정 총장의 이상한 근거

이 보도 내용은 어쨌든 '유전유학(有錢有學), 무전무학(無錢無學)'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조선일보>가 이처럼 교육의 '부익부 빈익빈'을 걱정하고 나서니 무척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조선일보>와 정 총장 모두 걱정하는 속셈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은 바로 '평준화 폐지'다. 그리고 이를 위한 근거로 교육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10월 24일자 기사
<조선일보> 10월 24일자 기사조선닷컴
이들의 말대로라면 비평준화 지역은 서울대를 무척 많이 진학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강원·경북·전남·충남 지역 전체 시도가 비평준화다. 그럼 이 지역 출신은 서울대를 아주 많이 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지표만 드러나고 있다.

대한민국 전체 고등학교수의 31.6%, 전체 고교생의 47%만이 평준화를 적용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알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숨기고 있는 것일까.

대개의 교육학자들은 이들의 주장에 고개를 흔들고 있다. 심성보 부산교대(교육학) 교수는 "평준화 시행으로 입시명문학교가 없어지는 등 오히려 특권층의 특권교육이 사라져 교육의 공공성이 그나마 지켜지고 있다"면서 "최근 수능이 어렵다보니 사교육 기관의 교육내용이 먹힌 결과 일부 문제가 나타나긴 하지만 이것이 평준화의 결과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전교조, 전국국공립대교수협의회, 참교육을위한학부모회, 전국공무원노조 등 5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범국민교육연대와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도 "특권층의 특권교육이 아닌 서민의 교육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 평준화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일보>등 일부 언론, 경제부처, 그리고 정 총장의 발언과 교육시민단체의 주장 가운데 어느 말이 타탕성 있는 이야기일까.

OECD교육지표 "부모 지위 따른 학업격차 한국이 최소"

실체를 정확히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위 보도대로라면 부모의 직업 등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학업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은 한국이 다른 나라에 견주어 아주 높아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OECD 교육지표 2002’를 보면, 한국은 부모 소득 격차에 따른 학생 성적 격차가 조사 대상국 가운데 가장 적은 나라로 나타났다. 소득 상위 25% 가정을 둔 학생의 학업성취도는 542점이었으나, 하위 25% 가정 출신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509점으로 그 격차가 33점에 지나지 않았다.

48개 조사참여 국가의 상위 25%와 하위 25% 가정 학생들의 학업성취도 격차는 평균 82점이다. 독일(114점), 스위스(115점), 벨기에(103점), 영국(98점), 미국(90점), 프랑스(83점) 등 대부분의 회원국 학업성취도 격차는 한국보다 2~3배나 컸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지난해 11월 교육개발원과 교육부는 "평준화 30년의 성과"라고 이구동성으로 분석했다. 이에 대해 토를 다는 언론보도는 없었다.

<문화일보> 올해 10월 17일자 "강남 고3 수능평균점수, 평준화 대구보다 낮아"란 기사도 눈길을 끈다.

"사설입시기관인 에듀토피아 중앙교육이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대도시 평준화지역 136개 고교(6만1304명)의 2002학년도 수능 성적을 분석한 결과 서울 강남지역 고3학생들의 수능 평균점수가 같은 평준화 지역인 대구지역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가 30일자 취재수첩도 <조선일보>와 정 총장의 이상한 '평준화 폐지' 근거를 지적하고 있다. 중앙일간지 가운데 유독 <한겨레>만 정 총장 의견에 반기를 들었다.

"서울대 진학률도 그렇다. 비평준화지역 ‘쟁쟁한’ 명문고들의 서울대 합격자가 해마다 줄고 있다. … 평준화와 비평준화를 왔다갔다한 강원도를 보자. 평준화였던 강원도 춘천·원주는 ‘명문고 육성론’에 밀려 1991년 비평준화로 돌아섰다. 이후 서울대 합격자 수는 더욱 줄었다. 춘천의 경우 평준화 시절 6개 인문고의 서울대 진학자 합계는 연평균 45명이었으나 비평준화 이후 30명으로 줄었다. 강원도 전체로도 80년대 후반 200명을 웃돌았으나 최근에는 60~70명 수준이다."

모든 사실이 진실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평준화 폐지'의 근거가 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 자꾸 '소 잡는 칼로 닭을 잡겠다'는 것인지 많은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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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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