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진정 사랑했을까?

이만교, <결혼은, 미친 짓이다>,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등록 2003.11.01 10:46수정 2003.11.0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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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교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텔레비전을 화두로 놓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고 얘기한다. 영화와 달리 소설의 많은 부분은 이런 경계 무너짐에 대한 말빨로 채워진다. 모든 것이 가상으로 모사되는 시대에 '진정함'은 의미를 잃는다. 당연히 그런 세상 속의 인간관계도 의미를 잃는다. 이만교는 빠른 리듬으로 얘기들을 뱉어낸다.

"하나의 현실 속에 다차원적인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치 텔레비전의 채널처럼, 다양한 삶의 양식이 서로 어긋나는 삶의 공식들이 하나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으며,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다만 채널을 돌려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을 너무나 또한 잘 알고 있다.


…우리 세대는 각자의 내면이 아예 텔레비전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우리는 텔레비전으로 세계를 인식하며, 따라서 세계에 대해 논평하지 않고, 텔레비전에 나온 것들에 대해서 논평한다.…심지어 우리 모두는 탤런트가 되어버렸다. 탤런트의 배역과 역할을 좌우하는 것은 탤런트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광고주와 시청자들의 반응과 방송국 소유주이듯, 우리들은 끝없이 광고로부터 욕구를 전달받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조절당하고, 우리의 물질적 소유주인 직장상사나 부모로부터 간섭을 받는 세대다. 내 안에, 언제부터인가, 텔레비전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결혼과 직장 생활은 정해진 대본처럼 상투화되어 가고 있다"
(278∼280쪽).

이런 사회에서 사랑과 결혼 역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왔다갔다한다. 이제 세상은 하나의 연극무대로 변한다. 결혼한 연희가 정기적으로 준영을 찾아오는 것도 다른 시간대에 방영되는 또 다른 '드라마'일 뿐이다.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 세은과 준영의 만남 역시 또 다른 한편의 드라마이고, 준영과 헤어진 여자친구 은지의 죽음도 눈물을 유도하는 드라마일 뿐이다. 이 세계에서 현실적인 것은 의미를 잃고 다른 비현실에서 또 다른 드라마로 재방송된다.

이만교는 '작가의 말'에서 이 글의 의도를 "나는 모든 독점적인 것, 권위적인 것, 성스러운 척하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어느 계층이든, 웃음과 농담의 대상으로 삼아보고 싶다. 나는 그들을 웃기거나 비웃어주고 싶다"(282쪽)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민음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 글에 앞서 글쓰는 자세를 가르쳐주신 김영석 선생님과 김용성 선생님, 새로운 의욕과 지평이 되어준 배재대, 인천대,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 선생님들의 격려와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린다.…헌신적으로 도와준 아내에게 좋은 소식 전할 수 있어 무엇보다 기쁘다"(284쪽)라는 얘기는 그 웃음과 너무 다르지 않는가? 끄덕거리며 글을 읽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소설 속의 준영만이 아니다. 작가 이만교가 사는 세계 역시 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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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역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실은 부르주아들이 발명한 낭만적 사랑이라는 환상으로 유지되는 일부일처제일 뿐이다. 김연수에게 근대의 사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사랑, 나르시스의 사랑일 뿐이다.


"인류가 봉건주의라는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오게 되면서 누구나 양반의 자제가 될 수 있는 자유의 시대가 펼쳐지자 역설적이게도 낙원은 영영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양반의 자제가 되면서 인류는 자기 얼굴을 잃어버리게 됐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가'를 부르며 바지 지퍼를 내리거나 브래지어 호크를 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어야만 상대방이 수많은 양반 자제 중에서 자신을 알아볼 게 아닌가?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뜻이다. 사랑의 대상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사랑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개인으로 자란다. 거울에 비친 그 위대한 개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79∼80쪽).


그래서 김연수에겐 사랑보다 기억이 더 아름답게 남는다.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123쪽).

김연수는 "그 한 송이 꽃이 없다면 999송이의 꽃은 존재할지언정 1천 송이의 꽃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랑을 한다는 건 그 한 송이 꽃을 통해 1천 송이의 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자신도 1천 송이의 꽃이 되는 한 송이 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는 일이다"(138쪽)라는 알쏭달쏭한 화두를 던지며 글을 맺는다. 아쉬운 일이지만 그의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건 없다. 어느 순간 나르시스의 '방탕함'이 돌아온 탕아의 '성숙'으로 변한다. 무작정 감각적인 말장난을 따라나선 느낌이다.

이만교와 김연수의 글은 지금 이곳을 사는 젊은 세대가 겪는 사랑의 혼란, 또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글로 표현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글들은 왜곡된 세상을 반대로 뒤집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있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조롱과 비웃음이 있을 뿐, 어떤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뭔가를 뜨겁게 사랑해 본 경험이 없어서인 것 같다.

김연수는 "선영아, 사랑해"라는 광고를 "사랑해, 조국아"로 패러디한다. 그에겐 '애국'이라는 단어 역시 사랑에 대한 나르시스적 집단고백일 뿐이다. 소설에서 운동은 냉소적이고 진우의 이미지로 대변된다.

"조금 덜 사랑하면 지금보다 세상이 조용해질 거야. 조국이든, 가족이든, 남편이든, 자기 자신이든" 진우가 혼자서 폭탄주를 들이켰다"(<사랑이라니, 선영아>, 95쪽). 그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마저도 나르시스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정말 그럴까?

이만교는 더 극단을 달린다.

"[광신도와 극단적인 운동권 학생과 대중문화에 중독된 친구간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글쎄, ……소리친다는 거?] [앵무새와 같다는 거야] [앵무새?] [가령, 광신도의 경우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고 성경의 몇몇 구절들만을 달달 외워서 외쳐대. 자기 나름의 생각이나 목소리는 사라지고 없어. 식사 기도문조차 사실 판에 박은 것처럼 언제나 한결 같아. <주님 오늘 이 음식을 차린 손길 하나하나에 당신의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고……> 또 극단적인 운동권은 늘 <해방, 이 억압된 현실을 뚫고, 저들의 음모 앞에 맞서서 당당하게……> 따위의 낡고 거대한 단어들만 들먹거리지. 그들 역시 자기 개인의 생각이나 표현이 없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채 대중문화에 중독되어 있는 친구들 경우도 마찬가지야.…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말뜻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말소리만 따라서 하는 앵무새의 지껄임과 다를 바가 없어]"(<결혼은 미친 짓이다>, 225∼226쪽).

이들에게 운동과 비판은 소설에 재미를 주기 위한 단순한 '양념'일 뿐이다. 나는 과거의 운동을 미화하고 싶지 않다. 다만 정말 사랑했다면 그 사랑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길 바란다. 짝사랑만 했다고, 혹은 자신을 떠났다고 해서 사랑의 대상을 비웃고 조롱해선 안 된다. 영화 <세기말>에서 시나리오작가 두섭은 "사랑하는 대상이라면 신중해야지. 영화를 밥그릇으로 보니까 함부로 별을 주고 그러는 거 아냐. 천박한 짓이야"라고, 노래 '몰래한 사랑'이 아니라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 사랑했었다면 헤어져도 슬픈 게 아니야"라고 얘기하지 않는가. 이만교와 김연수는 대중문화를 비웃지만 대중문화 속에 있는 그 단순한 진실마저도 꿰뚫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확대해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쉽게 비웃어서도 안 된다. 이만교와 김연수의 글에는 그런 '신중함'이 없다. 그건 그들이 한번도 사랑을 하지 않았거나, 사랑의 실패원인을 자신이 아니라 밖으로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에 대한 비아냥'이라는 유행에서 벗어나길 기대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 2000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만교 지음,
민음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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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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