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 여름을 맞이하는 시월의 마지막 날

뉴질랜드의 할로윈 데이와 가이 폭스 데이

등록 2003.11.03 05:59수정 2003.11.0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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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할로윈 데이에 괴물 가면을 쓰고 검은 망또를 두르고 우리집을 방문한 아이들. 사탕을 모으는 큰 비닐 자루에 'Trick or Treat'라고 쓰여져 있다.

할로윈 데이에 괴물 가면을 쓰고 검은 망또를 두르고 우리집을 방문한 아이들. 사탕을 모으는 큰 비닐 자루에 'Trick or Treat'라고 쓰여져 있다. ⓒ 정철용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 제목처럼 이제는 잊혀진 가수가 된 이용의 '잊혀진 계절'에 나오는 노랫말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날이 하필이면 왜 10월의 마지막 날이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10월의 달력을 떼어내면서 '이제 풍성하고 화려했던 가을도 끝이고 춥고 쓸쓸한 겨울이구나!'하고 느끼는 것처럼,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마음 역시 그처럼 춥고 쓸쓸하고 막막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내가 사는 이곳 뉴질랜드의 10월의 마지막 날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여름을 앞두고 축제의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유쾌한 날이다. 여름을 알리는 이 축제는 10월 31일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의 저녁부터 시작해서 11월 5일 가이 폭스 데이(Guy Fawkes Day)의 밤까지 계속된다.

할로윈 데이, 유쾌한 여름맞이 축제

할로윈 데이에는 마녀나 귀신 또는 만화 영화에 등장하는 갖가지 괴물들의 가면을 쓰고 목에는 검은색의 망토를 두른 아이들이 여러 명씩 무리지어 저녁 무렵부터 밤까지 집집마다 찾아다닌다. 문이 열리면 괴물로 분장한 아이들은 "혼날래 아니면 사탕 줄래?(Trick or treat?)"라고 집주인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면 집주인은 미리 준비한 사탕이나 초콜릿 등을 아이들이 내민 자루에 넣어 주는 것이다.

할로윈 데이의 유래

할로윈 데이는 유럽의 고대 켈트족의 삼하인(Samhain) 축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켈트족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죽음의 신 삼하인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바로 그 날이 10월 31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10월 31일에 겨울이 시작된다고 믿었으며, 이날 죽은 자들이 긴 겨울밤에 활동하기 위해 되살아난다고 생각했다. 할로윈 데이에 유령이나 마녀, 귀신, 요정 등의 의상을 입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하는 습속이다.

11월 1일을 '모든 성인들의 날(All Hallow Day)'로 지켜온 그리스도교가 켈트족에게 전파되면서 그들의 전통 축제인 삼하인 축제는 '모든 성인의 날 이브(All Hallow's Eve)'로 불려지게 되었고, 그것이 훗날 '할로윈(Halloween)'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켈트족의 후예인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할로윈은 미국인들의 축제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 후 영화 등을 통하여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사탕이나 초콜릿을 주지 않는다고 봉변을 당하지는 않는다. 단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좀 무안할 뿐이다. 이민 첫 해에 맞이한 할로윈 데이에 나는 바로 그런 무안함을 느껴야 했다. 당시 나는 할로윈 데이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었고 사탕을 미리 준비하라는 영어 교실의 선생님 말도 흘려들은 탓에 우리 집에는 사탕과 초콜릿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저녁 무렵에 누가 초인종을 누르길래 나가 보았더니, 괴상한 괴물 가면을 쓴 아이들 두 명이 문 앞에서 "트릭 오어 트릿!"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내가 "왓?(What!)"이라고 되물었더니, 서로 마주 쳐다보더니 그냥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별 싱거운 놈들도 다 있구먼!' 속으로 생각하며 문을 닫고 들어오는데, 딸아이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다. "맞아, 애들이 오늘 할로윈 데이라고 그랬어. 사탕 모으러 다니는 날이래!" 아마도 학교에서 듣기는 들은 모양인데, 영어 실력이 아직 짧아 잘 이해를 못하고 있다가 괴물 가면을 쓰고 우리 집에 나타난 그 아이들을 보고 비로소 이해가 간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다음 해부터는 미리 사탕을 많이 준비해 놓고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주었다. 올해에는 딸아이도 학교 친구와 함께 '트릭 오어 트릿' 전선에 나서서 사탕을 많이 모아 왔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준 사탕보다 딸아이가 모아 온 사탕이 훨씬 많으니 올해에는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a 거미줄 모양으로 정원과 입구를 장식한 집. 그래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흉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거미줄 모양으로 정원과 입구를 장식한 집. 그래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흉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 정철용

그런데 이곳에서는 할로윈 데이가 이렇게 아이들만의 축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함께 즐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아이들처럼 괴물스런 의상과 분장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할로윈 파티를 여는 술집과 레스토랑들도 제법 있고 또한 자기 집을 으스스하게 꾸며 놓고 마녀나 귀신처럼 분장하고 아이들을 맞이하는 어른들도 제법 있다.

a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가면 좀 다르다.  해골과 큰 거미가 장식된 복도 앞에서 분장한 레슬리와 가면을 쓴 그녀의 딸이 우리를 맞았다.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가면 좀 다르다. 해골과 큰 거미가 장식된 복도 앞에서 분장한 레슬리와 가면을 쓴 그녀의 딸이 우리를 맞았다. ⓒ 정철용

지난 10월 31일 저녁, 지역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찾아간 레슬리 벨(Lesley Bell)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앞 정원과 집의 입구를 거미줄로 장식하고 집 안도 해골과 괴물들로 장식해서 공포 분위기를 한껏 연출한 채 우리를 맞이한 그녀는 "해피 할로윈!"이라고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영화 <아담스 패밀리>에 나오는 가족처럼 분장한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은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신문에서 보고 워낙 아이들이 많이 몰려와 그녀와는 아주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녀는 매년 할로윈 데이에 이렇게 집을 장식하고 가족들과 이웃들, 그리고 찾아오는 아이들과 함께 유쾌하게 11월을 맞이한다고 한다. 이제 얼마 안 있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집 안팎을 꼬마 전등과 갖가지 장식물로 꾸며 놓을 테니 그때 또 와서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그러마고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던 마녀가 집 앞 가로등에 부딪힌 채 멈춰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도 그녀의 솜씨다. 그날 밤 열린 마녀들의 모임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레슬리의 집 앞 가로등에 부딪혀 정신을 잃은 이 마녀임이 틀림없으리라.

a 집 앞 가로등에 부딪혀 정신을 잃은 마녀. 할로윈 밤에 열리는 마녀들의 파티에 그녀는 이제 갈 수가 없다.

집 앞 가로등에 부딪혀 정신을 잃은 마녀. 할로윈 밤에 열리는 마녀들의 파티에 그녀는 이제 갈 수가 없다. ⓒ 정철용

가이 폭스 데이, 불꽃놀이로 맞이하는 여름

할로윈 데이가 지났다고 축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밤부터 들리기 시작하는 폭죽 터지는 소리는 11월 5일 가이 폭스 데이가 가까워지면서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밤하늘에 새겨지는 불꽃들도 점점 늘어난다.

일반 상점에서는 법적으로 판매가 금지되어 있는 폭죽과 화약이 10월의 마지막 주에서 11월 첫째 주에 걸쳐서 약 10일간은 판매가 허용된다. 그래서 이 때쯤이면 대형 슈퍼마켓은 갖가지 기묘한 할로윈 의상들과 더불어 다양한 폭죽들을 잔뜩 쌓아놓고 꼬마 손님들을 유혹한다.

한국에서도 최근 들어 할로윈 풍습이 젊은 층을 대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하면서 터무니없이 비싼 의상 등 지나친 상업성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상업성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그보다 더 염려하는 것은 안전이다.

a 할로윈 데이에서 가이 폭스 데이까지 뉴질랜드의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그것은 다가올 여름에게 지르는 뜨거운 환호성이다.

할로윈 데이에서 가이 폭스 데이까지 뉴질랜드의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그것은 다가올 여름에게 지르는 뜨거운 환호성이다. ⓒ 정철용

폭죽을 잘못 다루어 발생하는 안전사고나 화재를 염려하여 할로윈 데이와 가이 폭스 데이가 가까워지면 한결같이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어린이들의 안전과 관련한 계몽성 기사와 뉴스를 내보낸다. 그래도 매년 크고 작은 안전 사고와 화재가 끊이지 않고 발생해서 할로윈 데이에서 가이 폭스 데이까지는 소방대원들과 구급요원들이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하다.

역시 이민 첫 해 할로윈 데이의 밤, 나는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폭죽음과 하늘에 새겨지는 불꽃놀이를 이국에서 경험하는 색다른 체험이라고 생각하면서 즐겼다. 그러나 그 소동이 며칠을 두고 계속되자 조금씩 짜증이 나고 또한 바로 우리 앞 집 정원에서 큰 폭발음과 함께 불꽃놀이가 벌어지자 폭죽의 불똥이 잘못 우리 집에 튀어 불이나 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 옆집 빌 할아버지를 통해서 이러한 폭죽놀이, 불꽃놀이 소동이 모두 약 400년 전 영국에서 살았던 가이 폭스라는 인물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뉴질랜드도 영국인의 후예들이 이룩한 나라여서, 그 전통이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가이 폭스 데이의 유래

11월 5일 가이 폭스 데이는 1605년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당시 제임스 1세 치하에서 가톨릭의 탄압을 정당화는 법안이 통과되자 이에 불만을 느낀 가톨릭 교도들은 왕과 국회의원들을 모두 암살하기 위하여 국회 개회식날인 1605년 11월 5일 국회 의사당을 폭파시키기로 모의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화약을 다룰 줄 아는 몇 안되는 군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가이 폭스(Guy Fawkes)의 주도로 폭발용 화약을 국회 의사당의 지하에 설치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정보가 사전에 새어 나가는 바람에 가이 폭스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진 제임스 1세는 1607년에 11월 5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큰 모닥불을 피워 기념하였다. 이것이 기원이 되어 가이 폭스 데이에는 높이 쌓아 올린 모닥불을 피우고 그 불에 '가이'라고 이름 붙인 밀짚 인형들을 던져 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하며 또한 불꽃놀이를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뉴질랜드의 가이 폭스 데이는 그 본래의 의미에 충실하기보다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펼쳐질 여름을 앞두고 펼쳐지는 전야제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영국에서처럼 '가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밀짚 인형을 옆에 놓고 거리에서 아이들이 돈을 모으고 나중에 그 인형을 불에 태우는 화형식을 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불꽃놀이만 요란한 것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뉴질랜드에서는 10월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흥얼거릴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10월의 마지막 날은 '다가올 계절' 여름을 향해서 유쾌한 웃음을 함께 나누고 그 웃음을 밤하늘에 화려한 불꽃놀이로 새기는 날이다. 그 불꽃놀이의 유래와 의미를 알고 있다면 폭죽 터지는 소리가 더 이상 소음으로만 들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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