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물길 따라 신륵사의 종소리를 찾아

여주 영릉과 신륵사 그리고 고달사터를 가다

등록 2003.11.03 13:49수정 2003.11.0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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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와 영릉

경기도 여주는 옛부터 질 좋은 쌀의 산지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궁중에서 사용되는 그릇등을 생산했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이 있어 도자기로도 이름난 곳이다. 오늘날 여주가 도자기 축제로 유명한 것이 다 이런 연유다.


여주에서 생산되는 이런 물품들은 주로 뱃편을 이용해 한양으로 실어 날랐는데 이포나루와 조포나루가 그에 맞춰 발달한 포구들이다. 이 포구들은 서울의 마포나루, 광나루와 함께 한강의 4대 나루로 꼽힐 정도로 물동량이 많았다고 한다. 한강 상류이며 이 고을 사람들이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은 주변의 풍정과 어우러지며 그 수려함이 하도 뛰어나 문장가들이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여주는 고구려 장수왕 때 골내근현(骨乃斤縣)이며 그 후 황여, 여흥을 거쳐 1469년 세종릉이 왕대리로 천장되면서 여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이 천장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애당초 세종의 영릉은 경기도 광주땅 대모산(大母山 오늘날의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다. 이는 순전히 부왕 태종(헌릉)의 곁에 누우려는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종은 생전에 이곳에 미리 능자리를 잡아 두었는데 부인 소헌왕후가 죽자 지관들이 길지가 아니니 능자리를 철회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다른 곳에 복지를 얻는 것이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 하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소헌왕후의 능을 쓰면서 곁에 빈 석실을 마련해 두었다가 왕이 죽자 합장해 모셨으니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된다.

그러나 과연 길지가 못 되었기 때문인지 종종 영릉의 천장문제가 거론되었다. 세종의 아들이었던 세조가 서거정에게 천장문제를 논의했으나 서거정의 대답은 "살아 왕이면 됐지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하며 일축해 버렸다 한다.


그러나 결국 예종이 즉위하면서 현재의 여주 능서면 왕대리로 천장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지관과 정승들이 천릉지역을 물색하러 나섰는데 여주 북성산(영릉의 주산)에 이르자 소나기가 퍼부었다. 비를 피할 곳을 찾는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있어 그곳에 가보니 재실이 있었고 비도 멎더라는 것이다. 그 위 능자리로 올라가보니 천하명당이었다 한다. 영릉의 지세는 법도에 어긋나지 않고 층층히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국이라 한다. 거기에다 정남향이어서 "가히 만세에 나라를 이어갈 만한 기가 탄생할 자리"인데 이를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라 한다.


원래 이 자리는 이계전의 묘자리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계전이 죽으면서 자기 묘 근처에 재실이나 다리를 놓지 말라고 유언했는데 후손들이 재실과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그 후 영릉을 이장할 묘자리를 찾아다니던 지관이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이계전의 재실에 들어가 비를 피하던 중 산세를 보니 이계전의 묘자리가 천하의 길지인지라 이를 임금께 추천하는 바람에 묘자리의 임자가 바뀌었다고 한다.

a 홍살문에서 바라본 영릉 전경.

홍살문에서 바라본 영릉 전경. ⓒ 이양훈

영릉에는 관람객을 위한 탐방로를 능의 좌우에 아주 잘 만들어 놓았다. 이 덕분에 관람객들은 아무런 불편없이 영릉의 석물들과 곡장, 합장릉임을 나타내는 두 개의 상석을 자연스럽게 관람할 수 있으며 왕릉기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봉분에서 바라보는 기막힌 전망을 만끽할 수 있다.

모든 왕릉을 다 이렇게 만들 수는 없을까? 사적지로 지정된 왕릉에 잔디를 보러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왕릉 하나하나에는 그 시대 조각기술의 진수가 들어 있고 그 시대의 철학이 배어 있다. 멀리서 잔디를 보는 것 만으로는 그 모든 문화를 온전히 다 느낄 수가 없다.

탐방로를 제외하면 영릉은 여러 가지로 불편스러움이 있다. 3단으로 바뀌어 있는 참도(참도는 원래 2단이다)와 정자각의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향로, 그리고 방명록을 쓰기위해 갖다 놓은 책상이며 그 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국화 화분들... 이 모든 것이 70년대 박정희식의 개발과 보존의 실상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씁쓰레 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신륵사

여주의 대명사는 단연 신륵사다. 천년고찰 신륵사에 얽힌 전설이 두 개 전하고 있다.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자주 용마가 나타나는데 매우 거칠고 사나워 누구도 다룰 수가 없었다. 그때 신륵사 인당대사가 나서 신력으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는 설이 그 하나이고, 미륵 혹은 나옹선사가 이들 사나운 말에게 굴레를 씌워 용마를 막았다는 설이 다른 하나다. '늑'자가 말을 통어하고 다스린다는 뜻이니 말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 유적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이 절의 내력은 소상치가 않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물이나 유적이 없고,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조형물도 모두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것이다.

나옹선사가 경기도 양주 회암사를 크게 중수하고 낙성회를 여니 비단과 곡식을 가져다 공양하는 여인네들이 몰려들어 생업을 포기할 정도였다 한다. 급기야 조정에서는 나옹선사에게 밀양땅 형원사로 떠나라 명령한다. 나옹선사의 그 진한 종교적 매력과 호소력은 다름아닌 중생구제의 원이었겠으나 시대가 그를 수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미 병이 깊었던 선사였으나 나라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 길을 떠나 이곳까지 왔으나 더는 못가겠다며 신륵사로 들어갈 것을 재촉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열반한다. 그 때 하늘에선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용이 호상하는 등 신이한 일이 벌어지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 후 세종의 영릉이 천장되면서 바로 이 신륵사를 원찰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a 완성된 형태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전탑인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제226호

완성된 형태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전탑인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제226호 ⓒ 이양훈


a 신륵사 극락보전과 다층석탑

신륵사 극락보전과 다층석탑 ⓒ 이양훈

신륵사 극락보전은 정조 21년부터 3년에 걸쳐 완공했다 한다. 다포지붕이 화려하다. 경기 유형문화재 제128호. 그 앞에 있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다층석탑은 조선 성종 때 건립한 것이다. 석탑에 비룡을 조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인데 유독 신륵사탑에는 용이 많이 등장한다. 보물 제225호이다.

a 보물이 세 개씩이나...

보물이 세 개씩이나... ⓒ 이양훈

조금 왼쪽편에 보이는 것이 보제존자 석종부도이다. 부도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의 범주에서 벗어나 새롭게 변모된 고려시대 양식으로 조성된 부도이다. 보물 제228호. 그 앞에 있는 석등 또한 보물 제231호이다. 이곳에도 하늘을 나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신륵사는 용의 사찰인가? 저 뒤로 보이는 네모진 비석은 보물 제229호 보제존자 석종비다. 이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이 지었고 서예가로 이름높은 한수가 썼다. 보물이 3개씩이나 한 곳에 들어차 있다.

a 신륵사 조사당

신륵사 조사당 ⓒ 이양훈

대들보가 없는 팔작지붕인 조사당. 보물 제180호. 측면의 간주에 의해서 그 위로 대들보가 아닌 대량이 건너가 네 모서리의 추녀끝을 받치는 재목과 만나 건물을 이루고 있다. 집이 작고 아담해 건물을 유지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고달사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들어서면 20여 호의 농가가 도란도란 머리를 맞대고 있다. 마을 중심엔 거대한 둥치의 나무가 마을의 신목처럼 서 있고 그 앞으로 조금만 오르면 고만고만한 논밭들과 편편하고 너른 야산까지의 혜목산 고달사터가 나온다. 시원하게 트인 앞면을 제하고는 삼면이 야트막한 산봉들로 폭 싸여 수행터로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래서였는지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고달사. 이 절의 전성기였던 고려시대엔 사방 30리가 모두 절땅이었고 수백명의 스님들이 도량에 넘쳤다는데 향화가 멈춘 지 오래인 오늘날은 절터마저 한갓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 고달사터를 아는 이조차 드물다.

고달사 석조물은 모두 '고달'이란 석공이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불사를 끝내고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었으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다.

a 고달사터 석불대좌

고달사터 석불대좌 ⓒ 이양훈

이 대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 생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물 제8호. 그런데 보호를 한다면서 쇠난간이 이 대좌의 아래에 있는 주춧돌을 뚫고 있다. 조금 비껴가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지.

a 원종대사 부도비

원종대사 부도비 ⓒ 이양훈

보물 제6호 원종대사 부도비 귀부와 이수. 신라의 부도비 형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초의 웅장하고 정교한 부도비이다. 이 비신은 1915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져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날카롭게 조각된 발톱이 대단히 정교하다.

a 아기 자라 부도

아기 자라 부도 ⓒ 이양훈

원종대사 부도비에서 약 1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귀부. 비몸과 이수, 그리고 거북의 머리마저 깨져 달아나 버렸지만 웅장한 원종대사 부도비와는 달리 귀여움이 잔뜩 배인 아기 자라와 같은 느낌이다.

a 고달사터 부도

고달사터 부도 ⓒ 이양훈

국보 제4호인 고달사터 부도.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 부도 가운데 손꼽히는 거작으로 상륜부만 없을 뿐 각 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기단중대의 거북을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과 구름모양을 조각한 솜씨가 힘차고 능숙하며 대담하다.

팔각 탑신의 각 면에는 문비형과 사천왕상이 조각되고, 비교적 두꺼운 지붕에는 각 전각마다 높직한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신라부도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에서 고려시대 양식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각 부 양식수법으로 보아 고려 광종 9년(958)에 입각한 원종대사의 혜진탑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도굴된 부도인데 얼마 전 또다시 도굴을 위해 넘어뜨려 재차 훼손되었다. 왼쪽에 보호공사를 위한 철난간이 보인다.

a 원종대사 부도

원종대사 부도 ⓒ 이양훈

보물 제7호 원종대사 혜진탑. 이 탑은 고려 경종2년(977)에 건립된 원종대사의 부도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탄생하여 고려 광종 9년(958) 90세로 입적한 당대의 고승이다. 탑비와 같은 연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팔각원당형이며 각 부 수법이 매우 섬세 우아한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걸작품이다.

고달사터 부도의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크기나 조각 수법 등이 고달사터 부도의 모작인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경주 무열왕릉 귀부 옆에 있는 김인문 묘의 귀부를 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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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분야는 역사분야, 여행관련, 시사분야 등입니다.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www.refd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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