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과 데릴라는 왜 죽어야 했을까?

음악을 통해보는 페미니즘, 민은기의 <음악과 페미니즘>

등록 2003.11.03 11:24수정 2003.11.0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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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그날 우연히 이 음악가들이 모두 남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반에서 피아노 좀 친다고 뽑혀온 우리들은 거의 모두 여자인데, 위대한 음악가들은 모두 남자라니! 별로 피아노도 잘 못치는 저 두 명의 남자 아이들만 커서 음악가가 된다면, 나름대로 피아노 위에서 날고 긴다고 하던 우리 여자 아이들은 도대체 무엇이 되는 것인가?…

<음악과 페미니즘>(음악세상, 2000)의 저자 민은기는 그날의 충격이 여성 콤플렉스의 시작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자신이 여성인 것을 수치스러워하며 남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애썼다고 고백한다. 그가 지독한 여성 콤플렉스를 벗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페미니즘을 접하면서부터였다.

위대한 '여성' 음악가는 없다?!

민은기는 꼬마 시절 자신이 가졌던 두 가지 물음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하나는 위대한 '여성' 음악가의 부재에 대한 물음이다. 먼저 저자는 전기 작가들이 곧잘 만들어내는 예술가에 대한 신화가 허구임을 지적해낸다. 베토벤이 은은한 달빛 아래서 <월광 소나타>를 작곡하고, 쇼팽이 조국의 운명에 분노하며 단숨에 <연습곡 혁명>을 써내려가는 일이란 전기나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장면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러한 환상 전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환상들이 어찌하여 유독 그 사람들에게만 가능한가 의문스러워할 뿐이다.

그는 그 답을 '음악적 가부장제'에서 찾는다. 남성은 활동적, 이성적, 창조적인데 반해 여성은 수동적, 감정적, 봉사적이라는 고정관념 아래에서 일찌감치 여성은 작곡과 같은 창조적 활동에는 부적합한 인간으로 인식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는 악상을 구상할 여유도, 작곡법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작곡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승인도 주어지지 않았다.

연주 영역에도 '음악적 가부장제'는 엄연히 존재했다. 소수의 여성 연주자들은 대중적인 연주회 대신 집에서 열리는 살롱 음악회에 참여해야 했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도 제한되어 있었다. 트럼펫과 같은 관악기는 '연주할 때 입술을 모으고 숨을 가쁘게 들이켜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음탕한 생각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금기시되었다. 얌전한 자세로 연주하는 건반 악기와 하프, 지터 등의 현악기 정도가 여성 연주자들에게 허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성 연주자들은 '관객의 미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다른 것'을 갖추어야만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카르멘과 데릴라는 왜 죽어야 하는가?

꼬마 민은기가 던지는 또 다른 물음은 음악 속에서 여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였다. 저자는 답하기에 앞서 음악에서의 페미니즘 비평이 쉽지 않다고 전제한다. 영화나 소설과 달리 음악에서는 섹슈얼리티나 젠더의 구성이 일종의 약호 체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음악 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음악이 구성 단계부터 젠더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쇤베르크의 화성 이론은 장조와 단조를 남성과 여성에 대응시키고 있다) 성차, 권력, 섹슈얼리티같은 문제를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은 성녀와 창녀로 이분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한결같이 창녀들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다. 성실한 군인 돈 호세를 유혹한 카르멘은 그의 총에 맞고, 삼손을 파멸시킨 데릴라도, 마농 레스코와 비올레타도 목숨을 잃는다.


기악 음악에서도 가부장제적 구분은 쉽게 눈에 띈다.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남성을 상징하는 1악장은 grandioso(장대하게), marcato e violente(격렬하게 마르카토로), allegro con fuoco(힘차게 빨리)와 같은 음악 용어로 채워져 있다. 반면 비극적 처녀를 상징하는 2악장은 여성을 상징하는 바이올린, 플루트, 오보에 등의 악기가 주로 사용되며 dolce(부드럽게), consordion(약한 음으로)으로 연주된다.

페미니즘 음악의 가능성을 말하기

<음악과 페미니즘>은 꼬마 민은기의 물음을 성장한 민은기가 풀어내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저자가 답변과 함께 덧붙여 쏟아내는 자잘한(그러나 결코 덜 중요한 것은 아닌) 물음들은 그의 표현대로 난해하고 자기모순적이다. 그가 책의 말미에서 던진 세 번째 물음 "그렇다면 페미니즘 음악은 가능한가" 역시 그러하다.

'페미니즘 음악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가'라는 물음을 반복한 저자의 대답은 "가능하다"이다. 남성 중심의 정전(正典)을 대신할 만한 여성 중심의 정전을 확립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 역시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는 만족할 만한 해답을 내지 못한다.

이 책은 페미니즘 음악 비평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페미니즘 음악 비평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유발시킨다는 점에서 짖궂은 책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다. 재밌게도 이 책을 읽어볼 만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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