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말을 안 들어서 그래…"

영화 속의 노년(63) 〈선택〉

등록 2003.11.03 19:23수정 2003.11.0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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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말을 안 들어서 그래…"
90세 어머니가 사상범으로 45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70세 아들을 만나자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몇 마디 말씀을 하시는데 나온 소리다. 어머니는 아기처럼 작고 가벼운 몸으로 누군가에게 안겨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오셨다.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구분 없이, 누구나 다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스스로 선택한 길은 김선명을 길고도 긴 감옥 생활로 이끈다. 그 선택이 그의 운명을 결정 지었을까, 아니면 그의 운명이 그 선택을 하게 했을까. 스물 다섯에 시작한 교도소 생활은 머리 하얀 일흔의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그를 놓아준다.


교도소 안에는 그의 동지들이 있다. 안 동지, 남 동지, 박 동지, 종달이, 존경하는 이영운 선생 등등. 그들은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조국 통일에 희망을 걸고 어려운 교도소 생활을 지탱해 나간다.

비전향수 전담반 반장인 오태식이 등장하면서 이들에게는 무서운 위기가 닥친다. 교도소 내의 깡패 잡범들을 앞세운 무자비한 고문과 폭력은 사람이 사람이고자 하는 마지막 하나의 소망마저 무참하게 짓밟으며 계속된다.

누구는 미쳐가고, 누구는 맞아 죽고, 또 누구는 자살하고…. 그까짓 전향서 한 장 써주고 나가 더 큰 일을 하라는 회유는 그래서 참으로 타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미 잊혀진 존재로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이 조국의 통일에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는 이야기 또한 다르지 않은 이야기 같다.

사람에게 신념이며 양심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큰 사상은 버릴 수 있어도 작은 양심은 버릴 수 없다"는 김선명의 이야기에서 45년 동안 그를 변하지 않게 한 힘이 바로 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또 한 가지, 통일에 대한 희망이 더해져 있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감방 문에 붙은 숫자는 三五九六에서 3596으로, 양은 밥그릇은 플라스틱 밥그릇으로 바뀌어갔지만 양심과 희망에 뿌리를 둔 김선명의 선택만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시집갈 날을 앞둔 종달이의 딸이 면회를 온다. 더 이상 우리들의 삶에 걸림돌이 되지 말아달라는 딸 앞에서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이해해 달라고 할 뿐이다. 빨갱이 딸이라며 아이들이 다리에서 밀었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느냐며, 아버지는 내 등에 달린 혹이라며 우는 딸. 그 딸의 굽은 어깨와 등뒤에 달린 진짜 혹을 보며 영화 속 아버지도 나도 같이 울고 만다.

결국 전향서를 쓰지만 남은 형기를 다 채워야 했던 아버지 종달이. 취로 작업 중에 지나가던 김선명과 마주친 종달이. 아는 척 할 수 없었노라 답하는 그의 얼굴 위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딸은 이제 자신의 등에서 아버지라는 혹을 떼어놓았을까….


45년의 감옥 생활 중 21년을 독방에서 살았던 사람. "작지만 인간적인" 자전거 공장을 차리는 것이 꿈이라는 김선명이 벌방에서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개처럼 엎드려 밥을 먹는다. 그 때 그의 꿈은 어디로 잠시 몸을 피했을까, 아니면 그래도 꿈이 있어 '개밥'으로도 목숨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교도소 창 밖으로 세월이 가고 오는 동안 김선명은 노안(老眼)이 되고 환갑을 맞는다. 배식구를 통해 감방 동료들이 보낸 과자며 사탕 등등의 환갑 선물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올 때, 그의 시간은 잠시 정지했을까. 돌아보는 60년 세월은 그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이제 교도소장이 된 옛날의 오 반장. 공산당한테 아버지를 잃고 다리까지 절게 됐다는 오태식에게 김선명은 당부한다. 나는 이미 용서했으니 당신도 용서하라고. 그리고는 자신 때문에 아버지와 누이가 경찰에게 목숨을 잃었고 그 시신마저 찾을 수 없었노라 말한다. 오 반장과 김선명의 운명을 가른 것은 누구이며, 그들의 선택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8·15 특사로 석방되는 일흔의 김선명 할아버지. 영화는 아들을 만난 아흔의 어머니는 두 달 후 세상을 떠나셨고, 다른 가족들은 그를 만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북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함께 자막으로 전하고 있다.

북으로 간 그의 선택을 존중하듯이, 가족들이 겪어야 했을 어려움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기에 그를 만나지 않은 가족들의 선택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결국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인 것을.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느냐, 못 지느냐, 안 지느냐 역시 선택인 것을 우리는 아주 자주 잊고 산다.

아들의 어려운 한 평생을 두고 "어른 말을 안 들어서 그래…"라고 말씀하신 어머니.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평생을 감옥 안에 가두는 폭력 앞에서 어머니는 무슨 말로 그 회한을 다 쏟아놓으실 수 있었겠는가. 아들이 겪은 그 세월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던 어머니. 어느 덧 노인이 된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그 아들을 보고 나서야 목숨을 거둬 세상을 떠나시는 것으로 대답을 하셨다.

(선택 The Road Taken, 2002 / 감독 홍 기선 / 출연 김중기, 안석환, 최일화, 고동업, 김종철, 임일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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