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지금 감자꽃이 한창

나의 작은 텃밭 이야기

등록 2003.11.03 22:44수정 2003.11.04 10:2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하얀 감자꽃

하얀 감자꽃 ⓒ 김민수

입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인데 제주는 요즘 감자꽃이 한창이고, 나의 작은 텃밭에도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제주는 따스한 기온 덕분에 겨울에도 평지지역은 땅이 얼지 않아서 감자며, 당근이며, 배추와, 심지어는 상추까지도 겨우내 밭에서 푸른빛을 내며 식탁을 풍성하게 합니다.

물론 감자는 겨울이 되면 줄기는 푸른 잎을 잃지만 땅 속에서는 감자가 무럭무럭 자란답니다.

감자꽃을 보면 충주가 낳은 항일시인 권태응님의 동시 '감자꽃'이 떠오릅니다.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감자를 캘 때면 이미 꽃이 지고 없기에 정말 자주꽃 핀 감자에서 자주감자가 나는지, 하얀꽃이 핀 감자에서 하얀 감자가 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a 자주 감자꽃

자주 감자꽃 ⓒ 김민수


지난 태풍 매미에 갓나온 싹들이 똑똑 부러져 회생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더니 풍성하진 않지만 듬성듬성이라도 자라서, 이렇게 꽃을 피우니 고맙습니다.


나의 농사는 경제논리에 따르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농사입니다. 오히려 손해죠. 그러나 삶이라는 큰 틀로 보면 결코 손해가 없는 알짜배기 농사를 짓는 셈입니다. 흙을 만지고, 씨앗을 뿌리고, 얼마가 되었든 거두어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지인들과 내 몸에 모시게 되는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수많은 행복과 자기정리의 시간들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감자는 북을 충분히 주어야 하는데 작은 텃밭이다 보니 감자를 촘촘하게 심었습니다. 지난 해 너무 촘촘하게 심어 제대로 북을 주지 못해 이번에는 좀더 여유있게 한다고 했는데도 다른 밭과 비교해 보니 역시 도랑이 작습니다. 그래도 예년보다는 넓게 했고, 북도 많이 주었으니 더 많이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흙은 생명을 품고 있는 씨앗을 품으면 어머니가 되어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합니다.

요즘 나의 텃밭에는 여러 가지 채소들이 자라고 있는데 가지런하게 일렬로 자라고 있는 마늘 사이에 광대풀 새싹이 어찌나 많이 올라왔는지 모릅니다. 마치 누가 일부러 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올라와서 마늘밭을 점령해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마늘이니 광대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죄다 뽑을 기세로 뽑아버렸습니다.

검질을 매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선한 것은 애써 가꿔야 얻을 수 있는 법이고, 악한 것은 가만히 두어도 잘 자라는 법이구나 하는 생각말입니다.

우리들 마음을 하나의 밭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늘 선한 것을 가꾸기 위해서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잡초같은 것들은 무성하게 올라올 것이니 만일 선한 것을 가꾸지 않는다면 버려진 논에 피가 가득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온갖 쓸모 없는 것들로 가득하겠죠.
그리고 선한 것을 가꾸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서 끊임없이 자라나는 잡초같은 것들을 무던히도 뽑아내야 하겠죠.

마늘밭에 있는 광대풀들을 뽑으면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뽑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다 뽑으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알기에 그저 마늘이 자라는데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검질을 맵니다.

어쩔 수 없는 한계성을 합리화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아무리 선하게 살아가려고 해도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을 돌아보며 탄식하는 것이죠.

감자꽃에서 시작된 이야기.

이렇게 감자꽃을 보며 느낀 이야기들을 하나 둘 풀어놓다 보면 얼마나 풍성한 생각들을 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의 작은 텃밭을 좋아합니다.

나의 작은 텃밭뿐만 아니라 조물주의 정원인 자연, 그 앞에 서서 나무며, 꽃이며, 새들을 바라보면 나의 작은 텃밭에서 느끼지 못하는 경외감같은 것들까지 느끼게 되니 날씨만 좋으면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마치 죄를 짓는 것만 같은 생각에 자연의 품으로 쪼르르 달려가곤 하는 것이죠.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하양꽃이 피었습니다.
자주꽃도 피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는 시기에 핀 꽃이기에 더욱 더 바라보는 이를 행복하게 합니다. 나와 아내와 아이들의 손길이 닿은 감자에서 싹이 나와 꽃이 피었다는 것이 기적 같습니다. 그래서 눈이 시리도록, 감자꽃이 부끄러워 할 정도로 오래오래 바라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