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더 많은 학생이 죽어야 합니까?"

<현장> 입시 부담 자살 학생 추모제 '우리들의 죽음'

등록 2003.11.04 16:30수정 2003.11.06 08:31
0
원고료로 응원
"노동자가 계속해서 죽어 가는 데도 저기 위 분들은 노조가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비난하고, 학생들이 계속해서 죽어 가는 데도 저기 위 분들은 "이 시대 청소년의 나약한 정신", "단군이래 최저 학력", "평준화로 학생들 경쟁력 약화" 따위의 말들로 학생들을 입시지옥에서 계속 고통받도록 내버려둡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제도의 모순을 자각하지 않고 모든 잘못을 약한 사람들에게 떠넘겨 버리는 것일까요? 얼마나 더 많이 죽어야 그들이 제도의 모순을 깨닫고, 얼마나 더 많이 죽어야 제도가 개선되는 것입니까?"


<학생의 날>

1929년 10월. 광주로 통학하는 열차 속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이를 지켜본 한국인 남학생이 말리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그 후 일본 경찰은 일본학생은 가만 두고 한국인 학생만 일방적으로 처벌했다. 이에 광주 지역 학생들이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학생 운동을 일으킨 날이 바로 11월 3일이다.

일제강점기 6·10 만세사건, 광주학생운동 등 학생 독립 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 시켜 학생들에게 자율 역량과 애국심을 함양시키는 한편, 반독재·민주화 투쟁에 앞섰던 학생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 1953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했다.

그 후 학생의 날은 계속되는 학생들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으로 인해 유신 시대에 잠시 사라졌다가 1980년대에 다시 공식 기념일로 돌아온다. 특히 60주년이었던 89년에는 3만 명의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며 '5공 청산’ 을 요구하는 등 학생의 날은 ‘학생 민주화 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입시 부담 자살 학생 추모제' 가 학벌없는사회전국학생모임 주최로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렸다.

학벌없는사회전국학생모임은 학벌에 따른 차별을 뿌리 뽑기 위해 2000년에 만들어진 학벌없는사회(공동대표 홍세화, 홍훈) 산하 기구로 학벌 문제의 당사자인 학생들이 앞장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전교조, 21세기청소년공동체희망, 서울중·고등학생연합 등 7개의 관련단체들이 함께 한 이날 추모제에선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한국 교육 현실을 규탄하며 기형적 입시 교육에 목숨을 끊은 젊은 영혼들을 위로했다.

학벌없는사회 김상봉 운영위원의 입시 현실 규탄 발언으로 시작한 추모제는 추모시 낭독, 퍼포먼스, 자유 발언, 노래패 공연(전교조 노래패 - 해웃음) 등으로 채워지며 참가자 전원이 먼저 간 넋들에게 국화꽃을 헌납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어김없이 떨어진 기온은 곧 수능이 가까워짐을 예고하고 있었다. 무대 한편에 있는 TV에선 한 초등학생이 공부 스트레스로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태연하게 보도되고 있다. 스산한 바람이 살을 파고들자 정태춘 작곡에 박은옥이 노래하는 '비둘기의 꿈' 이 들리기 시작한다.


"봄 햇살 드는 창 밖으로 뛰어나갈 수 없네. 모란이 피는 이 계절에도 우린 흐느껴 … 우린 지쳤지. 좋은 밤에도 우린 무서운 고독과 싸워 기나긴 어둠 홀로 고통의 눈물만 삼켰네 … 안녕 이제 안녕 열 아홉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안녕…."

정신없이 공부하던 여학생이 목을 매는 퍼포먼스를 하자 순간 주위엔 정적이 감돌았다. 그 후 자유 발언이 이어지고 무대로 오른 학생들이 서로의 상처를 털어놓자 경직된 분위기는 곧 진솔한 대화의 장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대학에 가선 뭘 하고 또 과연 대학에 간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거죠?"

재수를 하고 있는 박성기(20)군은 "도대체 입시가 뭐기에 18, 19세에 자신들의 인생을 '올인' 해야 하는가?" 라며 "실제로 지난주에 자살하려다 말았다" 고 눈시울을 붉혔다. 또한 "먼저 간 친구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며 입시생의 힘겨운 심정을 솔직히 토로했다.

이어 그는 "참교육을 하는 선생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선 대학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다" 며 "교육 현실을 바꾸기 위해 죽지 말고 살아서 같이 싸우자" 고 당부했다.

잠신고 박엄지(17)양은 "결코 먼저 떠난 선배들이 용기가 없거나 혹은 나약해서가 아니다" 며 "오직 일류만을 인정하는 사회가 선배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고 일침을 가했다.

또 박양은 "추모제를 통해 선배들의 죽음을 되새기며 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돼야 할 것" 이라며 "선배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남아있는 후배들이 노력해야한다" 고 강조했다.

높은 성적을 유지하며 제도에 쉽게 적응한 주영민(17)군은 "다른 학생들을 살해하는 데 간접적 공범이라 느껴 과연 자신이 그들을 추모 할 자격이 있는지 고민했다" 고 밝혔다.

이어 주군은 "모순된 현실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살인을 직접 동조하는 것 같아 참석했다" 며 "먼저 떠난 선배들이 공존의 지혜를 배우는 참교육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고 전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학생들은 15명 남짓. 정작 행사의 주체가 돼야 할 학생들보다도 취재진이 더 많이 몰려 학생들이 쉬이 참여 할 수 없는 교육의 현주소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

여느 해처럼 이맘때면 성적비관 및 입시 스트레스를 못 이겨 자살하는 학생들이 끊이질 않는다. 지난 10월 만해도 입시에 부담을 느낀 세 명의 수험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죽음은 연례행사처럼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학벌없는 사회는 자살 학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언론 보도를 비판하며 이는 곧 책임을 느끼지 않는 정부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엄청난 죽음' 에 대해 언론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현실과 사람들의 무관심을 '반인륜적인 것' 이라 개탄하며 '학생들의 자살은 엄연한 사회적 타살' 이라고 꼬집는다.

학벌 없는 사회는 사회가 만들어낸 고도의 대학 서열화 구조 속에서 그들의 죽음이 반복되게 하는 것은 산 자로서 당연한 역할을 해내지 못한 '우리의 죽음' 이라고 정의한다.

또 그들은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될 것" 이라며 "더 많은 시민들이 학생의 죽음을 함께 기억하고 사람이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남은 자들에게 끝까지 외칠 것" 을 피력했다.

학벌없는사회는 5일 수능의 날에 맞춰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수능 반대' 퍼포먼스 및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이어 6일엔 청와대 앞에서 한국 교육 실태 표명의 기자 회견을 갖고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 질의서를 전달할 방침이다.

학벌없는사회 김상봉 운영위원 인터뷰

- 한국에서 해마다 200여명의 학생들이 자살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또 대다수의 학생들이 실제로 심각하게 자살을 고민하는 현실입니다. 학생들의 죽음이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구가 없는 경쟁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쟁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경쟁을 통해서 모두가 이길 수 있는 경쟁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성장하고 같이 발전하는 것이 건설적인 경쟁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입시 경쟁이라고 하는 건 매우 파괴적인 경쟁입니다.

이른바 일류대학 관문을 향해 모든 학생들을 몰아가고 있는 것이죠.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은 낙오자일 수밖에 없고, 낙오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겁니다."

- 요즘 고교평준화 해제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고교평준화 해제 문제는)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는 대학의 서열을 고등학교까지 확대해 보다 더 일찍 학생들을 입시 경쟁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방의 대다수가 평준화가 해제되어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학력을 더 신장시킨다는 통계는 없습니다.

서울까지 평균화를 해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건 정말 총력을 기울여 막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문제입니다. 고등학교까지 입시가 돼버리면 중학생도 바로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거고, 입시경쟁이 정말 살인적으로 격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

- 정몽헌씨의 죽음은 대서특별하던 언론이 어린 학생들의 죽음에는 무심한 것 같습니다.
"그거 정말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몽헌씨도 정몽헌씨지만, 올 초에 초등학교 교장 한 분이 여교사 차 시중 문제로 자살한 일이 있었잖아요. 그 때 온 언론이 마치 세상이 난리가 난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었는데, 학생들이 죽어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추모 행사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

- 언론사도 학벌구조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죠. 다 자기들이 나름대로 학벌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스스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학벌체제를 더 부추기는 일을 서슴치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현재라고 하겠습니다."

- 정부에 어떤 대책을 촉구할 예정입니까.
"결국은 학벌 사회라는 것이 대학서열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대학서열을 타파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 국립대학을 중심으로 서열이 타파되고 평준화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학벌구조 최정점에 있는 서울대학을-폐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대학원 학부를 개방하고 대학원 대학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장 절박하게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요즘, 입사철인데 최소한 젊은이들이 취직시험을 볼 때 학력난을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제는 폐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학력을 보고 학벌을 보고 사람들을 걸러내는 것은 명백히 인권침해입니다. 정부에서 앞서서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합니다." / 서상일 기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3. 3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4. 4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5. 5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