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어야 기사가 나온다"

[현장] 언론노조 '노동적대적 언론환경 현실' 토론회

등록 2003.11.04 18:27수정 2003.11.0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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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단체 관계자들과 현직 기자들은 최근 잇따른 노동자들의 죽음은 악의적인 보도에 큰 책임이 있다고 질책했다.
노동단체 관계자들과 현직 기자들은 최근 잇따른 노동자들의 죽음은 악의적인 보도에 큰 책임이 있다고 질책했다.신미희

"일단 적을 고립시킨 뒤 내부를 분열시켜 마지막에는 섬멸한다."

군사작전 용어가 아니다. 노동관련 보도 흐름을 단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우리 언론은 파업 등 '노동(노동자)'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또다시 제기됐다.

언론노조가 지난 3일 개최한 '노동 적대적 언론환경 토론회'에 참석한 노동단체 관계자들과 현직 기자들은 최근 잇따른 노동자들의 죽음은 악의적인 보도에 큰 책임이 있다고 질책했다. 특히 언론들이 과거 70·80년대 이념공세와 달리 '노조 망국론' '경제 악영향론' 등 경제적인 논리를 앞세워 노동자를 압박하는데 나서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노동보도 '고립→분열→섬멸'

이정호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국장은 우선 '고립→분열→섬멸' 순으로 진행되는 노동 적대적 언론보도의 사례를 제시했다. 2001년 6월 민주노총 연대파업의 경우 첫 날(12일) 언론은 일제히 "가뭄에 고액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시민불편을 주며 경제를 망치려고 파업하느냐"며 명분을 뺏고 "국민여론 등돌린 무모한 파업"이라고 고립 작전을 폈다.

다음 날(13일)부터 언론은 일제히 연대파업을 가뭄의 고통도 모른 채 하는 파렴치한 불법 집단행동으로 몰았다. 고액 연봉자들이 파업한다면서도 월급을 얼마나 많이 받는지 보도하는데 주력, 파업 명분을 뺏었다. 여기에 항공대란, 의료대란 등을 곁들여 '시민 불편론' '경제 악영향론'을 섞어 국민여론으로부터 파업을 고립시켰다.

13일 밤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의 협상이 타결되자 언론들은 2단계 분열작전에 들어갔다. 조합원 총회에서 합의안이 가결됐는데도 이들은 '이걸 얻으려 파업했느냐, 파업은 실패했다, 민주노총 파업 기가 꺾였다, 파업실패로 내부 분열이 생기고 지도부 책임지라는 목소리가 크다'며 분열을 시도했다.


협상 타결 사업장들이 늘어나자 언론은 3단계인 '파업 끝났다고 좋은 게 좋은 식으로 봐주는 정부는 무능하다, 모조리 잡아들여라, 민주노총 이대로는 안된다'는 섬멸작전에 돌입했다. 당시 정부와 재계, 외국 자본과 연합전선을 이룬 언론은 <한국 강성노조 투자 걸림돌>(조선), <노조 불법파업 처벌조차 받지 않아>(조선), <제프리 존스 미상의회장 "불법파업 강력대처">(동아) 등 외국 자본가의 강경 발언을 크게 키웠다.

2003년 '노동은 정권때리기' 종속 변수


그러나 2003년 언론의 노동보도 지형은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급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여정부 출범을 앞둔 올해 초 언론들은 인수위원회 노동정책을 때리기 위한 종속변수로 노동을 활용했다는 의구심을 샀다.

지난 1월부터 2월까지 언론은 <경제개혁 조급증 안된다>(중앙 1/6), <공무원 노조 너무 서둔다>(중앙 1/25) 등으로 인수위원회에게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게 될 노동자 친화적 정책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이후 언론은 노동을 정권때리기용 수단으로 이용하는가 하면 화물연대 1차 파업(5월)과 2차 파업 및 현대차 파업(7월)을 거치면서 일상적인 노동자 공격으로 돌아섰다. 특히 8월 28일 '민주노총 활동 정당성 없다'(조선 1면 머릿기사)는 노 대통령 발언이 대서특필된 뒤 노동문제에 관한 한 청와대와 정치권, 재계, 언론은 동일한 입장을 유지한 것으로 분석됐다.

8월 들어 언론은 사회의 부정적인 현상조차 노동자의 잘못이라고 강변하기까지 이르렀다. 대표적인 경우가 <40∼50대 중·상류층 '탈출 이민' 바람 "한국 희망없다"/"사회불안·북핵·집단투쟁 염증" 확산‥재산처분 투자이민>(조선 8/14)와 <전교조식 평준화 교육이 '기러기 아빠' 양산한다>(매경 9/4) 등이다.

2000년대 노동문제 비정규직에서 폭발, 언론은 무관심

손낙구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은 "70년대는 빨갱이, 80년대는 체제전복 집단, 90년대는 북한의 사주를 받는 세력 등 극단적인 표현으로 노동운동을 매도했다"면서 "이제는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으로 공격하는 자체가 먹혀든다는 게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밝혔다.

그는 올해 들어 종합일간지의 노동관련 보도가 경제일간지화 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매일경제가 지난해 말 기획 시리즈로 게재한 '한국은 노동공화국' 같은 악의적인 왜곡보도가 올해 5월 중앙일보의 노동 기획 시리즈로 확산됐다는 설명이다.

언론사 내부 구조에서 비롯되는 문제점도 적시됐다. 그는 "경제부장 출신의 사회부장, 기획(취재)부장 등이 업계 출입하던 눈으로 파업을 매도하는가 하면 일선 기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지방에서 사건이 많이 터지는데 지방 주재기자의 1신에 따라 파장이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도 변하고 있다는 점도 잊지 않았다. 91년만 해도 기획분신 발언에 언론이 동조해서 노동자를 공격하는 빌미로 삼았지만, 최근 영등포경찰서장의 같은 발언은 경찰서 기자실부터 비판 여론이 형성돼 결국 직위해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밖에 그는 기자들에게 △노동자들이 왜 그러는지 취재하고 알리는 방향으로 보도할 것 △해외 사례 악용을 주의할 것 △일선기자들이 엘리트 눈으로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것 지양할 것 등도 주문했다. 2000년대 노동문제의 폭발은 비정규직 문제라고 강조한 그는 "사건이 없어도 문제를 찾아내 예고하고 해법을 제시해달라"고 부탁했다.

노동부 출입기자는 있지만 노동담당 기자는 없다

이상호 MBC <미디어비평> 기자는 반성의 목소리부터 냈다. "그동안 노동문제를 적극 보도하지 못했지만 일상에서 불성실했던 보도가 '노동 적대적'으로 인식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노동부 출입기자는 있지만 노동담당 기자는 없다"로 표현한 그는 "출입처 위주의 현행 취재시스템으로는 인권을 책임지고 사회저변을 대변할 수 있는 기자가 없다"고 단언했다. 더불어 그는 "일정한 재미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언론환경에서는 불이 나고 사람이 죽어야 보도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심층·탐사보도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또 기존 편견을 벗어나기 위한 언론 스스로의 분발도 촉구했다. 그는 기자들이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공유하지 않으려 하고, 노동자이기보다는 노동자 집단에서 분리되고자 하는 관념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영삼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정책국장은 노동자 일반이 언론에 부당하게 취급되는 측면 이전에 보도 자체가 되지 않는 이중구조에 놓인 비정규직 실태를 털어놨다. 그럼에도 언론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구조 악화 등 이면을 파헤치려는 노력은 전무하다고 평했다.

박 국장은 "김주익 지회장이 죽었을 때도 무관심했던 언론이 대기업 노조와 관련한 비정규직 사안이 나오면 노동자 일반을 악의적으로 다루는가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참하게 취급한다"며 이중성도 꼬집었다.

"어느 편에 서기보다 팩트 차원에서 보도해야"

이광호 진보정치 편집위원장은 최근 노동자의 잇딴 죽음에 대해 "목숨을 던지지 않으면 사회가 고개를 돌리지 않는 상태에서 이슈화가 되기 위해서는 목숨을 던져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 위원장은 우리 언론이 민주노총에 가입된 노동자는 물론 조직화되지 않은 노동자의 일상적인 얘기를 다루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의 중요한 현안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언론이 마땅히 해야 될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또 노동자의 일상적인 요구뿐 아니라 사용자 자본가의 불법행위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실태를 강조한 그는 "어느 편에서 보도하기보다 팩트를 취재하는 차원에서라도 불법 부당행위를 알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하영 프레시안 기자는 "화물연대 파업 당시 부산에 갔는데 노동자들이 기자들한테 얘기해야 '입만 아프다'면서 출입을 통제하기까지 했다"면서 "우리가 하는 얘기 반만 다뤄달라고 요청하는 걸 목격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분신한 이해남 세원테크 지회장이 입원한 병원에서 '언제 죽느냐'만 기다리는 기자들 모습을 전하면서 '죽어서야 보도되는 노동자 처지'를 매우 안타까와했다. 그는 "노동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전문적인 지식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전문(전담) 기자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KBS 노동·사회갈등 보도준칙 왜곡 예방효과 클 것"

이날 토론회에서는 지난달 28일 제정된 KBS 노동·사회갈등 보도준칙에 대한 평가도 겸해졌다.

참석자들은 언론사 최초로 제정된 이번 보도준칙이 기자 개인이 의도하지 않은 왜곡이나 편향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또 직접적인 영향보다 사전예방 효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했다.

이광호 진보정치 편집위원장은 보도준칙 제정이 개별 기자의 직업적인 양심을 되찾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따라서 그는 언론사 내부에서 노사 공동으로 보도준칙을 제정했다는 것은 일부 기자들의 문제의식이 회사 조직에서 공유했다는 의미와 함께 직업적 양심을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했다.

이정호 언론노조 정책국장은 "조선일보의 윤리강령이 가장 구체적이었고 오히려 한겨레가 상대적으로 추상적이다"면서 "현장 기자들이 윤리강령을 어떻게 잘 지킬 수 있을지 논의되는 자리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번에 KBS 노동·사회갈등 보도준칙 제정을 주도한 김현석 언론노조 KBS본부 공방위 간사는 "아예 왜곡을 의도하고 달려드는 사람에게는 준칙 제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김 간사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언론사의 아젠다 세팅에는 효과가 없다"면서 "그러나 자기 색깔 없이 일부 논조를 따라가는 현행 언론, 특히 방송사의 보도 구조를 깨는 데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태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언론사 내부의 보도준칙 제정의 확산을 요청하기도 했다. 김 부소장은 더불어 "언론뿐 아니라 공정한 보도를 위한 노동계와 시민사회진영의 노력도 병행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부 참석자들은 KBS 보도준칙 제정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산술적인 공정성에 치우친 측면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앞으로 적극성인 공정성에 대한 모색을 추가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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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 사무차장, 미디어오늘 차장, 오마이뉴스 사회부장 역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노무현재단 홍보출판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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