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암에서 바라본 보리암안병기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라고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어느 결에 날이 밝았다. 오늘은 남해 금산을 오르기로 한 날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詩 <남해금산 > 전문
사랑은 운동의 일종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화되려고 하거나 같아지려고 하는 부단한 운동인 것이다. 시 속의 화자(話者)는 돌 속에 들어간 여자를 따라서 돌 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온 어느 여름 날 여자는 돌 속에서 떠나간다. 그의 운동은 끝내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떠나가는 여자를 해와 달이 끌어 준다. 해와 달이라는 아득한 물체를 매개로 삼은 이 사랑의 설화는 물씬한 슬픔을 자아낸다. 도대체 남해 금산의 어떤 풍경이 시인에게 슬픈 사랑의 모티프를 떠오르게 했을까. 그것은 내가 이성복의 시 <남해금산>을 읽은 1986년 이래 오래된 숙원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남해대교 근처를 출발한 버스는 한 시간을 달려 복곡 저수지 주차장에 사람들을 쏟아놓는다. 해발 681m의 금산이 한눈에 밟힌다.
금산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普光山)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말 이성계가 백두산과 지리산에 들어가 왕이 되게 해 달라고 산신에게 빌었으나 들어주지 않자, 마지막으로 이곳에 와 빌면서 만약 산신령에게 왕이 되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 주겠노라고 약속했단다.
그러나 막상 왕이 된 그는 고민에 빠졌다. 나라의 비단을 다 모은들 산을 두를 수 없을 뿐 더러 설령 두른다 쳐도 비단이 썩으면 산이 더럽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신하 하나가 산의 이름을 '비단 금'자에 '뫼 산'자를 써서 금산(錦山)으로 고치면 영원히 비단에 싸인 산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럴 듯하게 여긴 이성계가 보광산을 금산으로 고쳐 부르도록 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의 말은 한낱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않음을 탓해 무엇할 것인가.
복곡 저수지 주차장에서 보리암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가다 8부 능선쯤에서 하차했다. 20여분쯤 산길을 걸었을까. 멀리 아담한 절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바로 보리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