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기업 삼성과 싸우고 있다"

[인터뷰]삼성해복투 성시애 대외협력국장

등록 2003.11.06 02:54수정 2003.11.0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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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해복투 성시애 대외협력국장은 5일 오후 2시 '노무현 정권의 노동인권 탄압실태를 알리는 증언대회'에서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랬어요, 5년전까지만 해도 내가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힘겹게 싸우고 있는 다른 동지들을 외면하기도 했고요."

그래서였을까, 그는 지난 5년동안 노동자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껴야했다. 자신들의 억울함을 말하고 싶었지만 번번이 삼성의 자본력에 길이 막혔다.

적자가 3조 4천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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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민성

성 국장이 해고된 것은 98년 5월. 그 해에 삼성생명은 IMF로 인한 재정난을 이유로 1723명(이중 1200명이 여성노동자)의 노동자들을 해고시켰다.

"3조 4천억원의 적자가 예상된다, 회사가 위기에 처했다는 등 갖가지 이유를 대며 사표를 쓰라고 강요했어요. 집까지 쫓아가서 사직서를 받아오기도 했죠."

전국 221등이던 나주영업소를 56등으로 끌어올릴만큼 유능했던 그였기에 영업능력 부진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의 실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보험회사의 여소장들은 항상 열악한 곳에 발령이 나요. 대부분의 보험회사들이 그래요."

그는 '보험회사의 여소장들은 한마디로 총알받이'라고 자조한다. 여소장들이 열심히 일해서 영업소를 일으켜놓으면 이른바 '빽있는' 남자들이 소장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소장들은 열악한 다른 영업소로 자리를 옮긴다.


그런 식의 순환은 그가 일을 그만둘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성 소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새로 옮긴 곳은 나주영업소보다 더 열악했다. 당시 회사에서는 영업직원을 40명으로 늘리라고 주문했다. 그렇지 못하면 영업소간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성실히 뛴 덕분에 12명짜리 소규모 영업소를 25명으로까지 확장하긴 했지만 40명은 무리였다.

성 소장은 고민 끝에 자신의 영업소를 통폐합하기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일자리를 잃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성 소장만큼 일 잘하는 사람이 없다'는 칭찬을 늘상 들어왔기 때문에 또 다른 자리가 생길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는 군산으로 무보직 발령을 받았다. 자리도 없는 환급창구였다. 아무도 일을 주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일을 찾아서 했다.

"해약하러 오는 사람들 일일이 붙잡고 설득해서 돌려보내기도 여러번 했어요. 그렇게 하는데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왕따'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난 왕따 생활을 견뎌야 했던 거죠."

광주에서 군산까지 출퇴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이라도 오면 출퇴근 시간은 배로 늘어났다.

"저녁 6시에 퇴근해서 도착해보면 새벽 2시야. 7시까지 출근을 해야하니까 새벽 4시에 또 집에서 나와요. 힘들었죠, 그래도 할 수 없잖아요?"

해고되기 2년 전에는 조금 더 큰 일이 있었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신설된 96년 그가 호남총국장을 평등법 위반으로 고소했던 것이다. 각 지점당 여소장 1명씩을 의무적으로 대기발령내는 관례는 평등법에 명백히 위배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가, 부총국장이 날 부르더군요. 첫마디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렇게 큰 일을 저질렀냐는 거였어요. 삼성 사상 처음이라구요."

성 국장은 "노동법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좀더 강하게 나갔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그는,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순진하고 무지했기"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진정을 해놓고는 그 밑에다 처벌은 원하지 않는다고 덧붙인 거예요, 세상에. 그래도 나와 함께 일하던 상산데 싶었던 거지."

그 후 광주로 발령을 받았고 IMF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그는 정리해고 0순위로 떠올랐다.

"사표 용지도 A4용지 절반쯤 되는 그런 종이를 가지고 왔어요. 이미 말은 다 쓰여져 있구. 그래 가지고는 한다는 말이 '어쩔 수 없지않냐'였어. 지금 안쓰면 나중엔 더 힘들어진다고 회유하고 협박했지."

그는 "눈물을 머금고" 사직서를 썼다. 청춘을 다 바친 회사가 쓰러진다는데 개인의 욕심만 앞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10년 동안 청춘을 바친 대가가 1000만원이 못되는 위로금 뿐이었다. 삼성생명으로부터 대출연장도 받지못한 덕분에 그는 3000만원 대출금 이자로 1000만원을 물어야 했고 신용불량자 딱지를 얻기도 했다. 그나마 '내가 희생해서 회사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그를 위로해 주었다.

삼성은 언제나 앞서간다

그리고 성 국장이 진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적자가 나서 망할 지경이라던 회사는 그해 무려 956억의 흑자를 냈으며(보험회사는 정기적으로 회계연도말 결산보고를 해야한다) 1700명 해고자의 빈 자리는 98년 12월부터 삼성 계열사 직원들로 채워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서야 알았다.

"아무리 멍청한 노동자라고 해도 '내 자리 내놓으라'는 얘기 왜 안나오겠느냐 이거지."

그렇게 해서 삼성해복투가 결성되었고, 지금까지 5년동안 삼성을 상대로 한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삼성이 얼마나 웃긴지 몰라요. 우리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삼성건물 앞에서 집회를 했더니 업무방해 가처분신청을 하고 고시문을 받아놨어요. 거기에는 '부당해고 철회하고 원직복직 실시하라' '1700명 학살원흉 이건희를 구속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 벌금이 50만원이라고 적혀있어요."

성 국장만 해도 200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벌금을 다 물고나면 손배가압류가 기다리고 있다. 2001년 한 노동자가 대출 문의를 하러갔더니 업무방해로 20만원의 벌금을 물렸다. 대법원까지 가서 벌금을 10만원으로 줄여놨더니 3000만원짜리 손배가압류가 걸려있었다. 36만원의 재판비용을 내지못해 2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가압류당한 이도 있었다.

뿐만 아니다. 해복투에 참여한 사람들의 얼굴과 인적사항이 수배전단처럼 건물 앞에 붙여져있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들도 주민등록번호는 안나와요. 우리는 이름, 나이, 주소는 물론이고 주민등록번호까지 나와 있어요. 그래도 삼성건물 앞에서 집회 한번 할 수 없어요. 삼성이 100m 이내에 대사관을 유치해서 원천적으로 집회를 봉쇄하니까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참다못한 그들은 지난 10월 8일 서울에 모여 13일부터 대한상공회의소 앞에서 노숙단식투쟁을 시작했다. 80명의 노동자 중 70명이 3~50대 여성이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삼성측의 집요한 방해도 그들을 힘들게 했다.

"왜, 삼성을 정보통신 일류기업이라고들 하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감시하고 미행하는 것도 아주 일류급이에요."

집회를 할 때는 소매에 작은 녹음기와 비디오 등을 부착해 주위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농성장에는 수시로 대여섯대의 자동차가 상주해있다. 그마저도 경찰이 침탈하는 바람에 11일만에 끝이 났다. 20여명의 노동자들이 다섯군데 경찰서로 나뉘어 연행되었다.

"남대문, 종로, 성북, 노원…. 남대문은 관할이니까 그렇다치더라도 성북은 택시로 가도 1시간이 넘게 걸려요. 탈진한 노동자들을 굳이 그렇게 먼 곳으로 끌고가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이때부터 삼성의 빛나는 활약이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이 경찰서에 연행되자 가족들에게 전화해 이 사실을 알렸다.

"연행되었으니 데리고 가라는 거죠. 이런 전화를 친절한 경찰들이 했을까요? 아니죠, 삼성생명 인사관리팀이 한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전국적으로 이런 전화를 돌렸더라구요."

묵비권을 행사하는 노동자들의 노력도 무의미했다. 삼성 직원들이 노동자들의 상세한 인적사항을 이미 경찰측에 넘겼기 때문이었다.

"역시 삼성은 앞서간다니까. 손배가압류니, 노동탄압이니, 여성차별이니 소리소문도 없이 시작했잖아."

"목숨을 걸고 투쟁할 겁니다."

그리고 11월 4일부터 남은 58명의 노동자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삼성생명 여성차별·인권탄압 및 남대문 경찰서 삼성생명 허위대리신고 집회접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우리는 목숨을 걸었어요. 임신한 줄도 모르고 단식을 하는 바람에 낙태를 할 수밖에 없었던 동지도 있고 암 말기 환자인 동지도 있어요. 여기에 오고싶어했는데 힘들고 어지러워서 오질 못했어요."

하루에 두세명의 노동자들이 앰뷸런스에 실려간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러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5년동안 투쟁했습니다. 그동안 우린 너무 지치고 고통받았어요. 그래서 호소를 하러 간 겁니다. 이미 대법까지 가서 결정이 났으니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법으로 해결되었다면 우리가 왜 거기까지 갔겠습니까? 그런 말이나 하고 있으려면 도대체 인권위원회는 왜 있는 겁니까?"

그는 5년간의 투쟁기간동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의 벽을 절감했다. 삼성생명의 허위집회신고 역시 그에게 또 하나의 절망을 안겨주었다.

"며칠 전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어요. 헌법재판소에서 대사관 100m 내 집회금지는 위헌이라고 판정을 내린 거예요. 드디어 삼성건물 앞에서도 집회 할 수 있게 되었구나, 기쁜 마음에 남대문 경찰서로 달려갔어요."

그러나 이미 집회신고가 되어있었다. 삼성측에서 환경보호 캠페인을 위해 1년동안 집회신고를 해놓았던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지. 정보과에 공문이 들어온 게 오후 3시 10분. 우리가 경찰서에 도착한 것이 3시 38분, 정보과에 집회신고를 하러 간 것이 40분쯤이었거든. 그런데 신고가 되어있다는 거야. 접수장부를 봤더니 4시자로 접수되어 있는거야."

집회신고는 본인이 직접 가거나 등기를 통해서만 할 수 있다. 성 국장은 경찰측에서 대행해준 것이 아니냐는 짐작을 하고 있다.

삼성의 노조탄압이 곧 우리나라의 노조탄압

성 국장은 회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10년동안 일하면서 건강 수당 한번 챙겨본 일이 없는 그였다.

"나뿐만 아니에요. 삼성생명 여성 노동자들 평균 결혼연령이 35살 안팎이에요. 그 정도면 빠른 편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라니까. 이건 무슨 뜻이냐하면 인생의 가장 좋은 시기에 일만 한다는 거야. 아침 7시에 퇴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하니 개인적인 생활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거든요."

늦게 결혼한 여성 노동자들은 임신하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는다.

"어렵게 시험관 아기로 아이를 낳은 동지는 억지로 젖을 떼고 서울에 올라와 투쟁을 하고 있어요. 그나마 시험관 아기도 낳지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동지도 있구요. 회사를 위해 뼈빠지게 일한 대가가 임신 불능과 해고인 셈이죠."

그런 그에게 요즘 들려오는 '삼성의 이익은 국가의 이익'이라는 말은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말을 바꾸어 '삼성의 노조탄압이 우리나라의 노조탄압이고 삼성의 여성차별이 우리나라의 여성차별'이라고 표현한다.

"여타 기업들이 삼성의 기술과 이미지를 따라하듯이 삼성의 노동탄압도 부지런히 벤치마킹들을 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투쟁은 삼성을 향한 것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전체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거듭 말했다. "목숨을 담보로 끝까지 가겠다"고. 그리고 웃는다. "이제 해고자 지원투쟁대책위도 생겼으니 할만하다"고.

성씨는 5일로 단식 25일째를 맞고 있다. 우리나라의 최고기업과 싸우고 있는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있다.

"우린 절대 포기안해요!"

▲ 삼성해복투 노동자 김명희씨, 장제순씨, 성시애씨, 최정자씨(왼쪽부터)

성시애 국장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최정자씨, 김명희씨, 장제순씨. 대외협력부장을 맡고있는 최정자씨는 마흔한살에 얻은 돌박이 아이의 돌잔치를 단식 중에 치러야했다. 대구에서 온 김명희씨와 장제순씨는 단식 1주일만에 병원으로 실려갔다. 김명희씨의 아들은 친정어머니가, 장제순씨의 두 아이는 남편이 돌보고 있다.

"남편도 이해를 해요. 하도 억울하고 황당하게 해고되었으니까 열심히 싸우라고 격려해주죠."(장제순)
"저는 상경 29일짼데 4개월된 자식 얼굴도 잊어버릴 지경이에요."(김명희)
"얼마전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더라고 하더라구요. 남편이 ROTC 출신인데 이름도 모르는 ROTC 선배가 전화를 해서 부인 말리라고 했다는군요."(최정자)
"봉화의 한 동지는 남편이 와서 끌고갔어. 난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 아들이 군대가 있거든요. 난소를 들어내는 수술을 얼마전에 했더니 몸이 더 안좋아."(성시애)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고통스럽고 힘겹지만 그들은 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다른 사업장에서는 민주노조 씨를 말려버렸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씨도 못뿌려봤어요. 우리는 그 씨를 뿌릴 거고 우리처럼 힘들게 일한 여성 노동자들에게 작은 울림이나마 되고싶어요. 반드시 이길 겁니다." / 송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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