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학교, 여기 있습니다"

포항 영일고, '재미있는' 학교...1인 1기 모범사례로

등록 2003.11.08 16:50수정 2003.11.0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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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연일읍에 위치한 영일고
포항 연일읍에 위치한 영일고우동윤
경북 포항에 가면 ‘신나는 학교’가 있다.

정확한 행정구역은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엄밀히 말해 시내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포스코(구 포항제철)와 협력업체들이 잔뜩 들어서 있는 공단지역이다.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교육 여건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곳에 있는 학교, 영일고등학교가 바로 신나는 학교다.

영일고등학교는 지난해 EBS 교육방송이 주최한 ‘제1회 신나는 학교상’에서 대상인 으뜸상을 차지했다. 대도시의 수많은 학교들을 제치고 지방 중소도시의, 그것도 읍에 자리한 무명의 학교가 대상을 차지해 당시 큰 주목을 받았었다.

EBS 주최 '제1회 신나는 학교상' 으뜸상 상금 1천만원으로 세운 기념탑
EBS 주최 '제1회 신나는 학교상' 으뜸상 상금 1천만원으로 세운 기념탑우동윤
전국최고 수준의 관악반 등 활동해

이 상뿐만 아니라 영일고등학교에 있는 학생 동아리들은 전국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올해의 경우만 봐도, 이 학교 댄싱 동아리인 ‘ABLE(에이블)’이 지난 달 26일 여의도 특설무대에서 열린 ‘제11회 문화관광부 장관배 전국청소년 창작댄싱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했고, 산악부는 지난 달 25일과 26일 충북 보은 속리산 일원에서 열린 ‘제36회 대통령기 전국 고등부 등산대회’에서 우승, 지난해에 이어 2연패를 달성했다.

뿐만이 아니다. 이 학교 관악반은 고교 동아리의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다. 대한민국 관악경연대회에서 6년 연속 금상을 수상했고, 국제적인 관악축제인‘2003년 제주 국제관악제'에서 초청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완숙한 기량을 가지고 있다. 또, 지난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00년 경상북도 주최 새천년맞이 축제, 같은 해 세계 평화 팡파르 등의 굵직굵직한 행사에 단골로 초청받는, 지역의 유명 관현악단으로 인정 받은 지 오래다.

이밖에도 영일고의 미술반, 서예반, 문예반 등은 참가하는 대회마다 상위권 입상이 당연하다는 듯이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학교는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완벽한 방음장치를 갖춘 합주실은 물론 개인실습실까지 별도로 마련해 줬고, 전국대회 2연패에 빛나는 산악부를 위해서는 교실 하나를 비우고 인공암벽을 설치해 주기도 했다.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관악반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관악반우동윤
영일고는 완벽한 방음시설을 갖춘 개인실습실과 단체연습실을 보유하고 있다
영일고는 완벽한 방음시설을 갖춘 개인실습실과 단체연습실을 보유하고 있다우동윤
사설 학원 다니는 학생 거의 없어

이쯤되면 영일고가 예술고나 특수목적고가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이 학교는 분명 인문계 사립 고등학교다. 이 학교는 전국에서 몇 남지 않은 비평준화 지역인 포항에서 적극적인 학교 알리기를 통해 신입생을 선발하고, 나름대로의 교수-학습방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영일고에는 사설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공식적으로’없다는 사실이다. 이 학교 홍보부장 문병국 교사(윤리)는 “학교 몰래 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있는지는 몰라도, 학교에서 실시하는 활동을 빼먹고 학원에 가는 것은 절대 허락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 학생은 물론, 학부모의 호응도 대단하다고 한다. 한달에 한번 실시하는 어머니회에는 매번 500명 이상의 학부모들이 참가할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학부모들은 매달 어머니회 때마다 2천원 정도씩을 회비로 내고 이 돈으로 회의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준비를 한다. 적어도 영일고에 자녀를 보낸 학부형들 중에는 사교육비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실제 이 학교는 'EBS 신나는 학교상'을 수상한 이래로, 사교육비 경감 연구학교로 지정돼 그야말로‘연구대상’이 돼 있다.

우수한 대학 진학율 '자랑'

요즘 중고생들의 필수항목인 학원수강도 허락하지 않고, 1인1기(一人一技)로 함축되는 취미-특성화 교육이 이렇듯 활발한데 정작 학생들의 학업성적은 어떨까.

최상하 교장은 이에 대해“중학교에서 상위 40%에 드는 학생만 우리 영일고에 입학할 수 있다”고 말하고, “지난해 대학입시에서는 수시, 정시 모두 합쳐 3학년 학생의 약 90%가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고 말했다.

모두 435명의 3학년 재학생 중 390명이 4년제 대학에 합격했다는 설명이다. 소위 SKY이라고 불리는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도 적지 않다. 올해도 22명의 학생이 전국 4년제 대학의 1학기 수시모집에 합격해 놓은 상태다. 아무리 농어촌 특례입학의 혜택을 받는 지역에 있다고는 하지만, 이쯤되면 대단한 성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영일고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 최 교장은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가장 효과적이지 않겠어요? 우리 학교 학생들은 자신들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알 뿐더러 그것을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게끔 방향을 잡아주고 뒷바라지를 해주는 역할 뿐이죠.”

입학식과 졸업식을 음악회로 대신해 아름다운 선율로 후배들을 맞이하고 선배들을 보내는 학교, 봄부터 가을까지 매주 2회씩 학교 교정에서 ‘숲 속의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학교가 있다. 그리고 이런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한 학생들이 있다.

요즘 고교 평준화 논쟁이 다시 뜨겁다.‘평준화가 옳으냐’,‘비평준화냐가 옳으냐’를 떠나 요즘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가히 위기라 불러도 좋을 만큼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때 지방 소도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만들어 가고 있는 ’신나는 학교‘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학교에도 경쟁의 원리 도입해야”
영일고 최상하 교장

▲ 최상하 영일고 교장
“학생들이 하루에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15시간입니다. 재미가 없으면 공부든 뭐든 잘 될 리가 없죠. 신나는 학교, 재미있는 학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영일고등학교 최상하 교장은 이렇게 말한다. 최 교장은 지난 1978년 영일교육재단을 직접 설립해 영일고등학교와 중학교를 세웠고, 평소 가지고 있던 교육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1988년부터 지금까지 15년째 교장을 맡고 있다.

최 교장의 학교론은 ‘학생에게는 신나고 재미있는 학교, 학부모에게는 믿음이 가는 학교, 교사들에게는 보람이 있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타 명문학교와의 경쟁 속에서 지금의 영일고를 만든 원동력도 바로 이 학교론이다.

신나고 재미있는 학교와 함께 최 교장이 강조하는 것은 ‘인성교육’이다. 어느 학교든 인성교육을 강조하지 않는 곳은 없겠지만 영일고는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실천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수시로 개최되는 ‘영일 아카데미’와 ‘봉사활동’. 영일 아카데미는 유명인사 초청 강연 프로그램으로 지금까지 ‘신바람박사’ 황수관 교수와 정장식 포항시장 등이 강사로 참가했다.

또, 영일고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자매결연 시설을 방문해 일정 시간 동안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영일고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은 무의탁 노인 수용시설인 햇빛마을, 정애원과 정신지체 장애인 재활시설인 예티쉼터 등이 있다. 영일고는 최근 학생들의 봉사활동 소감문을 모은 단행본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의 고교 평준화를 둘러 싼 논란에 대해서 최 교장은 “평준화에 반대한다”고 잘라 말한다. 학생들에게 학교를 선택할 권리를 줘야 한다는 생각과 학교에도 경쟁의 원리를 도입해야 발전이 있다는 믿음에서이다.

비평준화가 되면 과거의 고교 입시가 부활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극성스런 과외열기가 불어 닥칠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는 적어도 영일고에서는 통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 우동윤

“사인해달라고 쫓아 다니는 팬들 꽤 많아요”
영일고 댄싱 동아리 ‘ABLE(에이블)’

▲ '에이블'이 연습실에서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영일고 댄싱 동아리인 에이블을 놓고 최상하 교장은 ‘영일만 친구’라고 불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두가지 이름에 대해 지도교사인 김진억 체육교사는 “하도 상을 많이 받아서 이제는 에이블이란 이름으로는 출전을 못하게 하니 교장선생님께서 다른 이름을 지어 주셨죠”라고 말한다. 그래도 학생들은 “우리는 영원한 에이블”이라고 말한다. ‘할 수 있다’는 의미가 크게 와닿고 또 그래야 하는 나이의 청소년답게 느껴진다.

에이블의 실력은 가히 전국적이다. 올해 받은 제11회 문광부장관배 최우수상은 접어 두더라도, 지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교육인적자원부장관배 전국 창작댄싱 경연대회 4년 연속 대상, 2001년, 2002년 문화관광부장관배 정국 창작댄싱 경연대회 2년 연속 대상을 받았다. 이들 모두 공중파 방송 예술단 안무가, 국내 굴지의 연예기획사 소속 안무가 등 그야말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심사위원들을 맡고 있는 대회들이라서 에이블의 기량이 전국적 수준임을 인정해 주고 있다.

포항에서는 이미 경쟁상대가 없어진지 오래고, 지역 대학이나 중, 고등학교 축제 때는 단골 게스트로 초청 받아 공연 후 사인해 달라는 학생팬들이 꽤 많다고 한다. 김 교사는 기자에게 “실제 모 방송국 예술단에서 오디션 한번 보러 오라는 연락도 받았고, 모 연예기획사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번번이 학생들이 싫다고 해 무산됐다고 한다. 학생들은 “물론 이 계열로 나간 선배들이 있기도 하지만, 댄싱은 단지 취미일 뿐, 본업은 공부”라고 당당히 말한다.

“부모님들도 학교에서 지원하는 동아리라면 아무 말씀 안하세요. 저희도 오후 4시까지 하는 정규 수업엔 절대 빠지지 않고, 공부하는 틈틈이 연습하는 게 오히려 더 좋아요”

이렇게 말하는 에이블 학생들이지만 이들의 연습시간은 하루에 무려 5시간이다. / 우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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