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의 성의식은 어느 정도?

법조인의 성별의식과 양성평등교육 실태 및 대안모색을 위한 토론회 열려

등록 2003.11.11 01:20수정 2003.11.1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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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의 성별의식과 양성평등교육 실태 및 대안모색을 위한 토론회'가 지난 10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렸다.

토론회에 앞서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설문에 대해 드러내놓고 불쾌한 기색을 보이는 법조인들이 있는 등 법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며 "8개월동안 힘겹게 진행된 연구에 대해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축사를 한 법무부 이영주 여성정책담당관은 "내 자신이 검사이자 여성이면서도 성별의식에 있어 부족한 면이 많았다"고 고백하며 "여성정책담당관실에서도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피해여성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표를 맡은 성폭력상담소 변혜정 연구소장, 성폭력상담소 김지혜 책임연구원과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 장현정씨는 각각 연구목적과 의의, 법조인들의 성별의식, 법조인 양성평등교육의 내용과 전망을 주제로 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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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민성

변혜정 연구소장은 이번 연구는 "성폭력이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로, 법조인들의 성편향성과 모순을 밝히고 보호법익으로서의 성적자기결정권 실현가능성을 따져보고자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평했다. 이를 위해 351명의 양적통계설문과 질적심층면접조사를 병행했으며 나이 대는 30대와 40대로 한정지었다고 설명했다.

성별의식 조사결과 법조인들은 30점을 기준선으로 25.21점을 받아(점수가 낮을수록 성평등적임) 성평등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남성(26.30)보다는 여성(20.22)이, 40대(26.82)보다는 30대(24.21)가, 판사(25.69)나 검사(26.58)보다는 변호사(24.17)가 더 성평등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안에 있어서는 성평등적 사고와는 다소 상반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성폭력은 남자들의 억제할 수 없는 성 충동 때문에 일어난다'는 항목과 '강간사건의 경우 합의금을 위해 허위고소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항목에 응답자의 약 40%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김지혜 연구원은 이러한 연구결과가 "법조인들의 성의식이 사회적 통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제 강간사건의 허위고소 비율이 다른 사건과 비교해 특별히 높지않았음을 볼 때 허위고소에 대한 법조인들의 우려는 지나친 것"이라며 "피해자들이 허위고소를 한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수사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김지혜 연구원은 또 "'피해자는 성폭력으로 인한 심리적 손상으로 피해정황에 대한 일관된 진술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는 항목이나 '강간 자체에 대한 공포만으로도 피해자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설문항목에 대해서는 70% 이상이 '그렇다'고 답변했으나, 심층인터뷰에서는 반대의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김지혜 연구원은 "법조인들의 성의식과 실제 사건에 맞닥뜨렸을 때의 대처 행태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법조인 양성평등교육의 실태와 전망에 대해 발표한 장현정씨는 "법의 제정과 집행, 적용 등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관점이 은폐되어왔다"며 "이 때문에 법조인들의 양성평등교육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법조인들이 양성평등교육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를 한 반면(전체 64.4%가 '필요하다'고 응답) 직접 교육을 받아본 경우는 30.95%에 그쳤다. 여성 법조인의 45.16%가 교육 경험이 있는데 반해 남성 법조인의 72.13%가 교육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로는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어서' '필수과목이 아니므로 다른 과목의 우선순위에 밀려서' 등이 있었다.

실제로 사법시험 합격자의 대다수를 배출하는 4개 대학(서울대·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을 대상으로 알아본 결과 대부분의 커리큘럼이 사법고시 과목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고 양성평등과 관련한 과목은 극히 소수임이 밝혀졌다.

장현정씨는 "법학도들 모두가 사법고시에 응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 중에도 다양하고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길 원하는 이들이 있다"며 "교육기관이 양성평등적 과목을 개설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책임방기"라고 비판했다. 또한 "단순히 과목을 많이 개설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충실하게 진행되도록 정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변혜정 연구소장은 연구의 결과로 ▶성인지적 교육 커리큘럼 구성 ▶여성관련법 관련 전공 및 과목 개설 ▶비정부단체를 전문연수기관으로 구축할 것 ▶성폭력 근절을 위한 여성·사회단체와의 지속적 연계를 제언했다.

이날 논평을 맡은 법무연수원 김종률 검사는 일부 발표에 대해 "법조인들의 내적인 심리과정을 배제한 여성편향적 시각"임을 지적했다. 그는 "최종의 기준은 사회일반인의 보편적 인식과 관념이 되어야 한다"면서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화간과 강간 사이의 공백구간은 강간으로 볼 수 없듯이, 법의 적용은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종률 검사는 "여성이 남성과 여관에 들어갈 때 그가 보통의 성인 여성이라면 암묵적으로 합의를 한 것이라고 보는 게 보편적 인식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또 그 여성이 친구에게 '알고보니 개털이더라'고 했다면 이를 어떻게 봐야하겠느냐"고 거듭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페미니즘을 공부한 사람만이 여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논평을 정리했다.

역시 논평자로 나선 이유정 변호사는 이에 대해 "편향이라고 느끼는 것은 경험의 차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밤거리를 걸어다니면서 성폭력의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며 그것이 바로 경험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의 차이가 인식의 차이를 야기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는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며 피해자의 편에 서보지 않고는 그들의 고통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에 이어 장현정씨는 "그렇다면 객관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그 객관성에 여성의 경험과 시각이 포함되어 있는가를, 법조인들이 말하는 '일반적 시각'은 잘못되지 않았는가를, 정말 객관적이라면 왜 오직 여성들만이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는가를 묻고 싶다"고 발언했다.

뒤이어 이와 관련한 관객들의 문제제기와 토론이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이날 사회를 맡은 성폭력상담소 김삼화 이사장은 "이번 토론회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법조인들의 성의식을 이야기해보는 자리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를 시발점으로 더욱 적절한 대안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김삼화 이사장은 "앞으로 적극적 성의식 고양과 양성평등 교육에 선도적인 노력을 해나갈 것"이라는 말로 이날 토론회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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