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피는 꽃에도 향기는 있다

꽃을 찾아 떠난 여행(123)

등록 2003.11.11 07:49수정 2003.11.1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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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동백

동백 ⓒ 김민수


지난 봄 동백꽃이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자신이 왔던 땅을 물들이고 사라진 이후에 붉은 동백꽃, 겹꽃이 아닌 홑꽃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 싶으면서도 통통하게 여물어 가는 동백나무의 몽우리가 터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어느 곳에서는 이른 동백꽃이 피었다고도 하는데 아무리 쳐다보아도 씨앗을 떨구어낸 동백의 단단한 껍질이 뒤틀려 남아있습니다.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모습 그대로 어스름한 저녁 햇살을 맞으며, 찬바람이 불어오는 들판에 서있던 동백나무의 푸른 이파리 사이로 그 붉은 빛 아름다움이 피어났습니다.

'참, 곱다. 막 피어난 자태가 18세 어여쁜 처녀같구나!'

a 흰동백

흰동백 ⓒ 김민수


흰동백꽃은 일주일 전에 만났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던 붉은 꽃이 아니었고, 홑꽃도 아니어서 단지 순백색의 아름다움으로만 다가왔습니다. 원래 동백꽃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꽃송이가 떨어져 그 아름다움을 땅에서도 한참을 빛내는 법입니다. 그런데 바람에 떨어진 꽃잎들을 보니 동백에 대한 이미지를 많이 수정해야 했기에 조금은 실망했습니다.

꽃을 보면서 늘 느끼는 것은 그들이 온 몸으로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세속적인 근심과 걱정, 염려가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아무리 예쁜 꽃을 보아도 심사가 뒤틀려 버립니다. 한데 그런 마음을 비우고 나면 아주 작은 꽃, 초라하다 못해 갈기갈기 찢긴 꽃, 시든 꽃에서도 그들의 내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연 앞에 설 때에는 가난한 마음으로 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나에게 들려 주고 싶은 소리를 듣게 되니까요.


a 쑥갓

쑥갓 ⓒ 김민수


여름 내내 작은 텃밭에서 자라며 식탁을 풍성하게 해 주던 쑥갓. 약간의 씁쓰름한 맛이 입안에 가득 돌기 전, 이미 텃밭에서부터 진한 향기를 전해 주던 쑥갓에서 이렇게 예쁜 꽃이 피었습니다.

식용으로 말고 꽃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 키워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만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 텃밭을 가꿀 때에는 늘 씨앗을 사다가 뿌렸는데 요즘은 조금 요령이 생겼습니다. 상추나 갓김치 같은 것을 그냥 꽃이 피고 씨앗이 맺힐 때까지 두었다가 밭에 훌훌 털어 냅니다. 그랬더니 상추며 채소가 우리 식구가 먹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자라주더군요. 이 쑥갓도 씨앗을 맺어서 그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a

ⓒ 김민수


꽃은 같은 종류면서도 각기 다른 모양으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합니다. 어느 것이 더 예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들만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개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성형 미인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처럼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한다지요? 물론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불가피한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데도 다른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고자 하는 욕심은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순수 미인, 자연 미인이 정말 아름답고 사랑하고 싶은 여인입니다.

a 말똥비름

말똥비름 ⓒ 김민수


꽃을 찾아 떠난 여행의 초창기에 어지간히도 헷갈리게 했던 말똥비름입니다. 꽃은 말똥비름이나 땅채송화, 돌나물, 바위채송화나 똑같은데 이파리의 모양 때문에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초보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동글동글한 잎도 앙증맞지만 작은 별을 닮은 노란 꽃도 앙증맞아서 마치 하늘의 별이 땅에 떨어진 듯 합니다.

밤새 떨어졌던 유성이 이곳에 내려와 꽃을 피워 반짝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만 바라보고 또 보게 됩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피어난 말똥비름. 언제 시들런지 알 수 없지만 아주 잠시라도 가장 화려하게 피었다 졌으면 좋겠습니다.

a 송악

송악 ⓒ 김민수


송악이라는 꽃은 11월에 피기 시작하여 이른 봄에 까만 열매를 맺는 덩굴성 식물입니다. 제주에서는 돌담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꽃이 피면 아직도 겨울을 준비하지 못하고 날아다니던 꿀벌이나 곤충들이 꽤나 많이 찾아옵니다. 추운 겨울을 나야 하니 조금은 투박한 데다 꽃도 작고, 색도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꽃은 꽃입니다.

a

ⓒ 김민수


절벽이나 바위에 핀 꽃, 환경이 꽃을 피우기에 적절하지 않은 곳에 핀 꽃은 향과 색이 진하다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고,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추운 계절에 피어나는 송악은 무엇으로 승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향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코에는 그리 좋은 향기로 다가오지 않지만 화들짝 피어난 꽃이 드문 계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곤충들은 고마워하겠습니까?

밤에 피는 꽃은 밤에 활동하는 곤충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에 피는 꽃들은 겨울에도 활동해야 하는 곤충들을 위한 것이겠지요. 어느 꽃 한 송이도 아무런 이유 없이 피고 지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는 우리들, 아무런 이유 없이 이 땅에 서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 들판의 꽃들도 그렇게 아름답게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우려면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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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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