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시 더듬더듬 읽기 ⑩> 문병란 시인의 <직녀에게>

등록 2003.11.11 08:36수정 2003.11.11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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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 A. E. 하우스만(Alfred Edward Housman)이란 시인이 쓴 <내 나이 스물 하나였을 때>(When I was one_and_twenty)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었다.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어느 현명한 사람이 말했죠. /은화나 금화는 주어버릴지라도 결코 네 마음은 주지 말아라. /진주나 루비는 주어버릴지라도 네 사람은 너에게 간직해 두거라/ 허나 내 나인 스물 하나였고/ 나는 하나도 귀담아 듣지 않았죠./


가만있자, 이 시가 어떻게 끝났더라.

(전략)
And I am two_and_twenty,
And oh,'tis rue,'tis true


생의 본질은 오류(誤謬)로 가득 차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는 결국 그 충고를 지키지 못한 채 생을 꾸려온 자신에 대한 끝도 갓도 없는 회한으로 끝맺음하고 만다. 사실 스물 한 살이란 나이는 그저 그렇게 무심히 지나가는 나이인 것이지 아직 무언가를 마음에 돋을 새김하며 지나가는 나이가 아니니 세월 지나 돌아보면 어찌 뉘우침이 없으리.

하여튼 난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이 시인의 돈은 줘버리되 마음은 주지말라는 별로 효용가치 없는 재테크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해 앞으로의 생을 꾸려나가기로 결심했다. 나의 자발적 무산(無産)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때는 긴급조치 9호 '유언비어유포죄'가 발동되기 직전이었다. 니체라는 사람의 '신은 죽었다"라는 확인될 리 만무한 유언비어가 유통기한이 지나도록 유통되고 있었으며 정신과 의사도 아니면서 "고독은 절망에 이르는 병이면서도 병이 아니다'라는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처방전을 쓴 키에르 케고르란 사람이 백수들의 술자리에서 넉넉한 '안줏감'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우리들의 술자리는 제법 풍요로웠다.


때때로 술을 좋아하던 박정희가 전 국민을 굴비 엮듯 엮어 버리려는데 대하여 안주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연사(演士)가 있었지만 말하자면 그것조차도 안주의 일종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언론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를 알려면 먼저 술집에 가봐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거니와 술집에서 씹지 못할 '안줏감'이 늘어나면 그 나라의 언론자유는 꽃 피어버린 대나무 숲이나 매한 가지라는 진리는 시대를 건너뛰어 여전히 유효할 터이다.


그런데 4월이 되면서부터 점점 술집의 분위기가 수상쩍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술꾼들에게 심각한 '안줏거리' 공급 봉쇄 조치가 내려졌다. 이른바 유언비어 유포금지의 긴급조치 9호라는 것을 발동함으로써 박정희는 이 나라 술꾼들의 '안줏거리'를 일거에 매점매석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안주없는 술을 마시기 싫은 사람들은 아예 술을 마시지 않거나 아니면 그냥 깡술이라도 마시며 그럭저럭 세월을 유기물에서 무기물로 분해할 뿐이었다.

한편 서울 무교동 낙지 골목 언저리에선 콧수염 기른 통기타 가수 이장희의 <그건 너>라는 노래가 발악하듯 불려지고 있었다. 누구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하여간에 안주거리가 동이난 건

"그건 너! 너 때문이야!"

그러나 태어나기를 본래 당나귀 귀로 태어난 박머시기에겐 이 소리 역시 당나귀 귀에 화엄경 읽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무렵 그렇게 흘러가던 시대를 슬퍼는 하되 크게 분(憤)을 내지는 못한 채 나는 그저 광주 한 귀퉁이에서 백수의 기초나 절차탁마하며 지내던 차에 술집에서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 하루는 그가 날더러 그 유명한 반골시인(反骨詩人) 문병란을 만나러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문병란 시인? 여류시인인가?

길게 따져 무엇하랴. 남아도는 건 시간밖에 없는 백수가 가기로 치면 어딘들 아니 가겠는가.그리하여 지산동 비탈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서 시인의 집에 당도하니 시인은 마침 반바지 차림으로 중학생인 딸의 공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빳빳하기로 이름난 반골시인(反骨詩人)이 집에선 이처럼 유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채로웠다. 그리하여 수인사를 끝내고 나니 무슨 술이었던가 기억이 떠오르지 않지만 하여간에 술이 나왔다.

문병란 시인
문병란 시인
술을 몇 잔 들이키고 나자 우린 제법 호기로워졌다. 문병란 선생도 자기야말로 진정한 민족시인이요, 민중시인이라는 약간의 자기과장을 섞어 척박한 현실을 질타했다. 아마도 추측컨대 그때는 시인이 조선대, 광주일고 등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나마 겨우 발붙인 학원에서마저 등을 내돌린 직후인지라 이런 류의 과장으로라도 자신을 곧추세우는 순간이 필요했는지 모를 일이다.

시인은 나에게, 작년(1973)에 나오려다 정보부에 모조리 압수 당해 겨우 한 권 남았다면서 하드 커버가 약간 떨어진 <정당성>이란 시집을 선물로 주었다. 시집의 내용은 일본의 국기인 히노마루로 대표되는 일 제국주의와 유신독재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가득 찬 것이었는데 그 시집은 누군가 집어가 버리고 안타깝게도 지금 내 머리 속엔 딱 한 귀절밖에 남아있지 않다.

하루 콩나물 밥 세끼를 먹고도 /난 용케도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민주화된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별 것 아닌 이 귀절은 그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문구였다 할 수 있었는데, 시인은 아무튼 흠없는 책을 주지 못해 매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속지에다 이렇게 사인을 해주셨다.

破本(파본) 안병기님에게, 문병란 드림

파본이란 이를테면 겉표지가 손상됐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 귀절이 빌미가 되어 이후 우리 집에 놀러와 이 시집을 본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破本"이라고 부르며 놀려대곤 했으니 그렇게 나의 호는 졸지에 "파본'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파본-망가진 놈이라… 수리불가라… 무릇 세상의 시인이라 칭하는 자들에겐 예언자적 선견지명이 있다더니 문병란 시인이 바로 그러했다. 내가 이 나이 되도록 나이 값도 못한 채 '파본'인 채로 생을 어기적 뚱기적 거리며 살아갈 줄을 시인은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말나온 김에 아예 내 인터넷 닉네임을 '늑대별' 대신 파본으로 교체해 버릴까보다!).

그 후로 두어 번 정도 더 시인을 찾아갔던가. 얼마 후 광주를 떠난 후로 나는 문병란 시인을 더 이상 만나 뵙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영욕으로 가득 찬 시대를 결코 꺾이지 않고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질타하며 핍박받는 민중과 5월 광주를 노래해온 문병란 시인. 세상을 낙관도 비관도 없이 흔들흔들 걸어가던 내 나이 스물하고도 하나였을 때 만난 아름다운 정신이었다.

문병란 시인의 시 <직녀에게>는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광주의 노래패 <소리모아>의 박문옥('누가 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구할까'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이 문병란 시인의 시에 바탕을 두고 작곡한 것을 역시 광주의 민중가요 가수 김원중이 부르는 <직녀에게>라는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문병란 詩 <직녀에게> 전문(全文)

가슴은 이념 보다 훨씬 더 솔직하다. 그 솔직한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는다면 우리가 타고넘지 못할 장벽이 어디 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라는 한 마디 말이, 그 조용한 비유가 가슴에 와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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