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추악한 한국사회, 나는 이렇게 봤다

김미경의 <여성주의적 유토피아, 그 대안적 미래>

등록 2003.11.12 01:17수정 2003.11.1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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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세상문고

여성사회학자 김미경은 사회학자를 "방안의 화초가 시들었을 때 그 원인을 생각해보고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사람에 비유한다. 사회학자는 사회 문제를 진단하고 개선하려는 변혁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한다는 뜻이다.

10여년간의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김씨가 마주친 한국 사회는 '시든 화초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발디딜틈 없는 고급백화점과 명품관, 버려진 중고 냉장고와 자동차들, 이처럼 끝없이 소비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사람들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신기한 풍경'을, 그는 "'외국인'이 되어 넋을 잃고 지켜봐야 했다"고 고백한다.


김씨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바라는 대안적인 사회상은 어떠한 모습일까? 저자는 그의 책 <여성주의적 유토피아, 그 대안적 미래>(책세상문고, 2000)에서 -자신의 "전공과 관심사에 따라"- '성 위계적 분업구조'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보고자 시도했다.

김씨는 노동만을 최상의 가치로 간주하고 상하위계가 분명한 현대 사회를 '권위주의적 노동사회'라고 명명한다. 이런 사회에서 생산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시장을 통해 상품으로 전환되어 화폐로 교환"되는 것만을 의미한다.

반면 출산과 육아와 같은 가사 내적노동은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취급받는다. 가사 내적노동을 주로 담당하는 여성들의 노동력 역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여성은 대부분 제조업 노동에 비해 결코 수월치않지만 보수는 훨씬 적은 소비형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전문직에서조차 하위의 위계-이를테면 의사보다는 간호사, 교수보다는 교사직-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노동력 수요가 떨어지면 정리해고 0순위에 오르는 것은 '부양해줄 가장이 있는(그렇다고 믿어지는) 여성들'이다.

김씨는 이와 같은 '성 위계적 노동사회'가 야기하는 문제를 사회위기, 경제위기, 정치적 위기, 환경위기로 나누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위기는 여성들의 정체성 위기로 표출된다. 현존하는 성별 노동분업 및 역할 분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는 여성의 사회 참여는 여성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여성들은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전통적' 역할과 직장인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떠맡고 끙끙대게 된 것이다.

김씨는 이러한 여성의 이중고를 청소년·노인 복지와도 관련시킨다. 청소년, 노인을 부양할 임무는 여성의 책임만은 아니며 오히려 청소년·노인 복지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0대 80의 사회'로 대변되는 경제위기에서도 약자는 여성들이다. 국제노동기구(ILO)에 의하면 여성이 전 세계 노동시간의 2/3를 담당하지만 여성에게 주어지는 것은 1/10의 수입과 1/100의 노동수단이 전부다.

전 세계 무급여성의 노동을 돈으로 환산하면 1년에 11조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같은 빈곤의 여성화가 가속되는 상황에서 저자는 생태 페미니즘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꼽는다. 신자유주의적 사회를 인간의 생존권을 중심으로 재편성하기 위해서는 좀더 다층적이고 협동적인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위기와 관련해 저자가 다루는 것은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둘러싸고 으레 벌어지는 논쟁-새 판을 짤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정치구조와 문화에 끼어들 것인가-이다. 그는 '끼어들기'로는 기존의 가부장적 정치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동시에 여성들이 새로운 판을 짤 준비를 얼마나 하고 있는가 묻는다.

또한 김씨는 환경위기가 여성들에게 또 하나의 부담-쌀뜨물을 화분에 버리기, 우유팩 재활용하기 등-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닌지 경계한다. 실제로 환경오염의 주원인은 공장의 독가스와 폐수 등임에도 불구하고 주부들에게 환경정화까지 떠맡으라고 '호들갑을 떤다'는 것은 그의 표현대로, 어불성설이다.

이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김씨는 다양성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다양성은 '정상' 이데올로기가 삶을 통째로 규정하는 획일성과 다르며, 순응적이고 현실에 안주하는 보수성과도 거리가 멀다. 진정한 다양성이란 차이를 함부로 '비정상'이라고 비난하지 않으며 서로의 권리와 자유,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다양성이 지켜질 때 자신이 꿈꾸는 여성주의적 유토피아도 가능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책에서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김씨가 여성들에게 보내는 비판의 목소리이다. 그는 '거시적인 구조라는 틀 안에서 여성이 가부장제의 희생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방조자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남자아이에겐 파란색 옷을 사주고 "남자니까 참아야지"라고 말하는 어머니, 시어머니한테 받은 대로 며느리에게 돌려주고 싶어하는 어머니는 가부장제의 희생자이자 방조자이며 재생산자이기도 하다는 것.

김씨의 말대로 이 책이 여성문제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많지않은 분량에 폭넓은 주제를 담으려고 한 욕심 역시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과 평가는 구체적이고 유효하며 그 결과 드러난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는 꽤 추악하다.

여성주의적 유토피아, 그 대안적 미래

김미경 지음,
책세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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