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려 했지만...전 울보입니다"

두 분 어머님 생각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등록 2003.11.12 17:44수정 2003.11.1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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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라는 아름다운 아리아가 있습니다. 도니젯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남자 주인공 네모리노가 부르는 곡이지요. 그 노래에는 사랑하는 이의 눈에 보일 듯 말 듯 솟아난 눈물을 보고 그녀의 사랑을 확신하는 기쁨과 행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녀간의 사랑에서 솟아나는 눈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종종 눈물을 흘립니다. 아무리 세상이 살벌하고 감정이 메말랐다고 해도 감동적인 영화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되면 저절로 눈물이 흐르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여자들과는 달리 대부분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이러한 눈물을 억지로 삼켜야만 합니다. 그렁그렁 넘칠 듯한 눈물은 남들이 보기 전에 얼른 닦아내야 합니다. "사내자식이 울기는…. 남자는 질질 짜면 못 써!"하고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아 온 탓이지요.

나도 그렇게 교육받은 남자 중 한 사람이어서 좀처럼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게는 눈물이 좀 많다는 것이지요. 영화나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TV에서 전하는 사소한 뉴스와 책에서 발견한 짧은 글귀에도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그때는 남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요령껏 눈물을 닦아내거나 얼른 자리를 피하곤 하지요. 그래서 철들고 나서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흘린 눈물은 대부분 '남 몰래' 흘린 눈물인 셈입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벌써 두 번이나 남들 앞에서 '나도 몰래' 눈물을 흘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a 돌을 맞은 딸아이를 안고 계신 나의 어머님

돌을 맞은 딸아이를 안고 계신 나의 어머님 ⓒ 정철용

딸아이는 피아노를 배우러 매주 한 번씩 김 선생님 집에 레슨을 받으러 갑니다. 우리 집에서 멀기 때문에 늘 내가 자동차로 데려다 주고, 레슨을 받는 동안 기다렸다가 다시 태우고 오곤 하지요. 그렇게 매주 한 번씩 만나다 보니 김 선생님뿐만 아니라 그 남편과도 무척이나 친해져서 이제는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곳 뉴질랜드로 이민 온 시기도 비슷하고 가치관과 세계관도 서로 통하는 데가 있어서, 매주 금요일 오후면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저녁 식사 시간을 놓칠 지경입니다. 오후 4시에 가서 저녁 7시가 다 되어서 돌아오는 나를 보고 아내는 말하곤 하지요.


"동윤이 피아노 레슨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당신 수다 떨러 가는 거지?"

지난 주 금요일에도 그렇게 김 선생님 부부와 얘기를 주고받았지요. 조금씩 친해지면서 속내를 드러내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누게 되었는데 그 날은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9살 때 아버지를 여읜 이후 숙부님과 숙모님의 손에 자라난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내게는 조금도 부끄럽거나 상처로 남아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숙모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느 순간, 나는 그만 울컥 치미는 울음 때문에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 앞에서 나를 두고 말할 때 한 번도 '조카'라고 하지 않고 '큰 아들'이라고 소개했던 당신이 문득 너무나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나도 숙모님을 한 번도 '작은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늘 '어머님'이라고 불렀는데, 정말 친어머니처럼 공을 들여 나를 키우셨던 당신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던 것입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창피해서 얼른 일어나서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a 모처럼 곱게 입고 어린 손주들과 함께 한 나의 또 다른 어머님

모처럼 곱게 입고 어린 손주들과 함께 한 나의 또 다른 어머님 ⓒ 정철용

이와 비슷한 일이 어버이날이 며칠 지난 5월의 어느 날에도 있었습니다. 내가 다니는 영어 교실에서 수업을 하던 중이었지요. 나이가 제법 드신 영어 선생님 앤(Ann)은 어느 할머니가 자기의 세 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어 테이프를 틀어주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정확히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제 결혼해서 각각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딸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테이프 듣기를 마친 후, 앤(Ann)이 내게 묻더군요.

"이런 장모님 있으면 좋겠지요?"

그 말에 나는 우리 장모님은 그보다 훨씬 더 좋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장모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두 문장을 채 말하기 전에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짧은 영어 실력 탓이 아니라 갑자기 복받치는 울음 탓이었습니다. 20년을 넘게 서울 변두리에서 장인어른과 함께 양계를 하시면서 딸 둘과 아들 둘을 모두 대학교까지 보내신 당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내 울음 소동 때문에 한동안 수업이 중단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옆에서 가만히 내 등을 토닥여주고, 같이 듣는 한 한국 여자 분께서는 사무실에 가서 휴지를 가져와 내게 건네주었습니다. 다 큰 남자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눈물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 창피했지만 나도 몰래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목소리는 크지만 웃음이 많고 인정이 많으셔서 지금도 소녀처럼 아주 작은 것에도 감동하시는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아무 것도 따지거나 재지 않으시고, 단지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나를 사랑한다는 그 사실 하나 만을 보고 당신에게도 몹시 소중했을 딸자식을 선뜻 내게 주신 장모님 역시 내게는 또 한 분의 '어머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나는 장모님을 '장모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어머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두 분 어머님 생각에 나는 두 번이나 남들 앞에서 '눈물을 질질 짜는 사내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해지기도 하더군요. 남들이 볼까봐 조심해가며 '남 몰래' 흘리던 내 눈물을 남들 앞에서 '나도 몰래' 흐르는 눈물로 만드는 힘, 그것이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인 모양입니다.

내 두 분 어머님께서는 뉴질랜드로 이민가는 우리를 보고도 서운해하시기보다는 축하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도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겠지요. 내가 흘린 눈물은 어쩌면 그 두 분께서 속으로 감추고 있었던 그때 그 울음이 이제야 내게서 흘러나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교롭게도 내 두 분의 어머님은 생일이 나란히 이웃해 있습니다. 모두 음력으로 생일을 쇠시는데, 올해는 이번 주 토요일(11월 15일)과 일요일(11월 16일)입니다. 이제 만 나이로 예순 셋이 되시는 숙모님 아니, 나의 어머님과 예순 일곱이 되시는 장모님 아니, 나의 또 다른 어머님의 생신을 멀리서 축하드립니다. 두 분 어머님 모두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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