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보다 테러방지법이 더 무섭다

테러방지법안 국회 정보위 통과에 부쳐

등록 2003.11.15 14:20수정 2003.11.1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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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권악법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한다."
14일 아침 국회의사당 앞에서 인권활동가들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목에 피켓을 걸고, 손은 펼침막을 부여잡고.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국회 경비대가 달려왔고, 우리는 경찰서로 실려갔다. 끌려 나오게 되리라 예상하면서도, 우리로서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14일 오전에 국회 정보위원회가 테러방지법안을 논의하게 되는데,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한 마지막 행동까지 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a 11월 14일 아침 9시 45분 경 국회의사당 앞에서 인권활동가들이 테러방지법안 제정 반대를 외치고 있다.

11월 14일 아침 9시 45분 경 국회의사당 앞에서 인권활동가들이 테러방지법안 제정 반대를 외치고 있다. ⓒ 참세상방송국 박종모

그러나 기어이 정보위원회는 만장일치로 한나라당 홍준표, 민주당 함승희, 열린우리당 김덕규 의원이 공동 발의한 테러방지법안 수정안을 통과시키고야 말았다. 매일 끊이지 않는 정치비리와 싸움질로 국회를 진흙탕으로 만드는 그들이 테러방지법안 제정에는 의기투합을 했다는 사실이 더욱 큰 절망감을 안겨준다.

국가정보원이나 정보위 소속 의원들은 "그동안 문제가 됐던 인권침해 조항들을 모두 제거했다"고 말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테러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 기반해 국정원의 권한을 확대하고 내·외국인에 대한 감시체제를 강화한다는 본질적인 문제점은 수정안에서도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국정원 주도로 처음 테러방지법안이 발의된 이후 지금까지 몇 차례 수정안이 나왔지만, 끄떡하지 않는 것은 국정원장 산하에 대테러센터를 설치한다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법은 국정원 산하 대테러센터 설치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현재도 국정원은 국정원법에 따라 대테러업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왜 굳이 테러방지법의 제정을 통해 대테러센터를 설치하고자 하는 것일까? 국정원이 새로운 법률을 통해 하나의 조직을 보장받음으로써 정보기관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한다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한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의 판단이다.

대테러센터는 관계기관의 '대테러활동을 기획·조정'하고 각종 정보 업무를 총괄하게 된다. 이로써 국민의 감시로부터 벗어나 비밀주의에 따라 움직이는 '음지의 권력기관', 국정원이 '테러방지'를 빌미로 일반 국가기관의 행정에까지 개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대테러센터의 장은 특수부대의 출동을 요청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도 갖게 된다. 인권침해 조항들을 모두 제거했다는 게 이러한 모습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테러센터의 장은 '테러 우려'를 이유로 외국인에 대해 정보 수집을 위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고, 출입국 규제를 요청할 수 있다. 말이 그럴듯하게 '사실관계 확인'이지, 그것은 감시와 통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감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진짜 '테러리스트'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외국인노동자들인 것이다.


최근 국정원이 파키스탄 출신 귀화 한국인에게 이슬람 사원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동향파악을 요구했던 것만 봐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국정원은 그 사안에 대해서도 '통상적인 정보활동'이라고 말을 했었다.

출입국 규제 요청권한도 문제다. '테러혐의'를 남용해 외국인을 강제 추방하거나 국내에 못 들어오게 함으로써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화될 소지가 큰 것이다. 미국의 예를 보면, 특정 민족, 인종, 공동체가 정보 수사기관들의 감시의 표적이 되면서 강제추방, 입국 제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는 너무나 심각한 지경이다.


감청권한도 강화된다. 법안에 따르면, 통신비밀보호법 상에서 국정원장이 통신제한 조치를 할 수 있는 사유에 지금의 '반국가활동'에다 '테러'가 추가되는 것이다.

군 병력이 동원될 수 있도록 한 조항도 그대로다. 국정원이나 정보위 소속 의원들은 지원된 군 병력이 시설 보안 및 경비업무만 수행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상상해보자. 계엄도 아닌 상황에서, 청와대나 국회나 무역센터 주위를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광경을.

국제사회에서도 테러에 대한 정의가 합의되지 않았을 만큼 테러의 개념이 모호한 상황에서, 테러 대응을 빌미로 권한을 남용하고 기본권이 침해될 소지는 너무나 크다. 더군다나, 이번 수정안의 수정이유에서 북한과 이슬람을 국내외 테러위협으로 명기했다는 점은 이러한 우려를 더욱 부추긴다.

북한을 '악의 축', '테러지원국'으로 분류하는 미국에 의해 한반도의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테러방지법안의 수정 이유에서 테러와 북한을 연계 짓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나 위험하고 무책임한 발상이다. 이슬람을 명기한 것도 신인종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미국에서도 9·11 이후 아랍계 외국인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관리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것마저 미국을 쫓아 하는 것인가? 이러한 인식이 국정원이 중심이 된 대테러활동에 반영된다고 할 때, 내국인과 외국인에 대한 기본권 침해와 자유의 축소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평화마저도 '테러방지', '국가안보'라는 이름 하에 도리어 위협받게 될 것이다.

이미 반테러법제가 만들어진 나라들의 경우에도 '반테러'가 자유를 억압하고 인권 침해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비판이 강하게 일어, 유엔 내 인권전문가들과 국제법률가위원회 등 국제인권단체들은 대테러조치라는 이름 하에 인권에 관한 국제법적 의무를 위반하는 국가들의 행위를 감독할 것을 유엔에 촉구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국가보안법 하에서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국민들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유린하는 야만이 50년 넘게 지속돼 왔는데, 테러방지법이라는 또 다른 산을 만나게 된 셈이다.

작년 무산됐던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가 다시 확인된 지난 9월 이후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은 정보위 소속 의원들을 만나고 의견서를 보내고, 공청회에 참석해 반대 의견을 개진하고, 국회 앞에서 집회를 하는 등 테러방지법 제정을 막기 위해 온 힘을 쏟아 왔다.

그러나 법안이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과한 이 때, 우리의 힘이 너무 미약함을 새삼 다시 느낀다. 또한 국정원을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하는 국회 정보위원회가 사실상 국정원의 기능과 권한을 키워주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다시금 절망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아직 법안의 최종 통과까지는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라는 절차가 남아 있다. 한번 악법이 만들어지면 그리고 그 법에 의해 이익을 얻는 권력집단이 있다면, 그 법을 없애기는 정말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통해 분명히 알고 있다. 또 하나의 악법의 탄생, 테러방지법의 제정을 막는 일이 너무나 절실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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