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위(Kiwi)와 코위(Kowi)가 만나다

오클랜드에서 열린 ‘2003년 한국의 밤’ 행사에 다녀와서

등록 2003.11.16 17:07수정 2003.11.1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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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키위(kiwi)라고 하면 세 가지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식물성이면 한국에서 흔히 양다래라고 부르는 과일이며, 동물성이면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하는 뉴질랜드의 국조(國鳥)를 말하며, 사람을 두고 말할 때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뉴질랜드인을 애칭으로 부르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코위(Kowi)란 무엇일까? 눈치 빠른 사람은 짐작했겠지만 그것은 뉴질랜드에 사는 한국인을 뜻하는 말이다. 아직 사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한국인(Korean)과 뉴질랜드인(Kiwi)의 합성어인 코위에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뉴질랜드의 국민이라는 이중성을 동시에 끌어안아야 하는 우리 교민들의 초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코위도 어디에 방점을 찍는가에 따라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키위(Kiwi)에 방점을 찍는다면 한국계 뉴질랜드인(Korean New Zealander)이 될 터이고 한국인(Korean)에 방점을 찍는다면 뉴질랜드 거주 한국인(Korean in New Zealand)이 될 것이다.

우리 교민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따라 위 두 가지 부류 중 그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이기에 더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곳 키위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문화에 좀 더 개방적이고 넓은 수용력을 보여주는 전자의 부류, 즉 한국계 뉴질랜드인들이 더 바람직하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a 곱게 한복을 입은 아이들이 청사초롱을 들고 행사장으로 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곱게 한복을 입은 아이들이 청사초롱을 들고 행사장으로 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 정철용

지난 11월 14일(금) 저녁, 오클랜드의 알렉산더 파크 연회장(Alexander Park Function Center)에서 개최된 ‘2003년 한국의 밤(Korean Night 2003)’ 행사는 바로 이곳 한인사회의 이러한 전향적인 입장과 태도를 뉴질랜드의 주류 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된 의미있는 행사였다.

지난 해에 이어 두 번째로 이번 행사를 주최한 재뉴질랜드 한인회(The Korean Society of New Zealand)의 강완지 회장은 개회사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새기되 이곳 뉴질랜드인들과 상생(相生)의 삶을 누리기 위해 마련된 행사”라고 밝힘으로써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이번 행사에 참석한 헬렌 클락(Helen Clark) 뉴질랜드 수상도 올해 정전 50주년 기념으로 방한했을 때 한국의 눈부신 발전상에 크게 감명받았음을 언급하면서, 이번 행사가 뉴질랜드내 한인사회가 한국과 뉴질랜드 간의 우호협력에 큰 교량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 깊은 행사가 될 것이라고 축사를 해주었다.

주최 측에서는 바쁜 시간을 내어 이번 행사에 참석해 준 헬렌 클락 수상에게 현재 서부 오클랜드에 살면서 도예가로 활동 중인 심상술 씨 내외가 직접 제작한 도자기를 선사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a 헬렌 클락 뉴질랜드 수상을 정우성 대사와 강완지 회장이 행사장으로 모시고 있다.

헬렌 클락 뉴질랜드 수상을 정우성 대사와 강완지 회장이 행사장으로 모시고 있다. ⓒ 정철용

이렇게 뉴질랜드내 우리 한인들과 기업들의 활동상과 한국의 전통 문화예술을 뉴질랜드 주류사회에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보여줌으로써 한국과 뉴질랜드 사이에 무지개다리를 놓고자 하는 이번 행사의 취지는 모든 면에 잘 반영되어 있었다.

우리의 전통 무용 공연과 전통 의상 패션쇼뿐만 아니라 서양 클래식 성악곡 공연까지도 포함하는 프로그램은 참석한 이곳 현지인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동시에 교민들에게도 새삼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한국인과 현지 키위들이 서로 어울려서 식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사전에 테이블 배치를 해서 끼리끼리 모이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나 아직 한국 음식에 익숙지 않은 현지인들을 위하여 식사 메뉴와 후식을 다양하게 준비한 것에서도 배려의 마음이 배어 있었다.

이러한 주최 측의 마음을 읽었는지 건배 제의를 한 노스 쇼어(North Shore)의 조지 우드(George Wood) 시장은 “한국의 노 대통령을 위하여” 잔을 들어주었다. 이에 질세라 사회를 맡은 멜리사 리(Melisa Lee)는 다음 날(11월 15일) 호주의 월러비 팀과 럭비 월드컵 결승전 진출을 놓고 겨루게 되는 뉴질랜드 국가 대표 럭비 팀 “올 블랙(All Black)의 승리를 위하여”라고 덧붙임으로써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키위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오마이뉴스 기자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나는 예상보다 훨씬 더 짜임새 있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행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또한 오클랜드의 존 뱅크 (John Banks) 시장과 국민당의 팬시 웡(Pancy Wong) 의원 등 주요 정관계 인사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의 행정 수반인 헬렌 클락까지도 참석한 것을 보고 이 행사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우리들만의 잔치’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a 행사장 한쪽에는 우리의 전통 한지로 만든 닥종이 인형이 전시되어 키위들의 눈길을 끌었다.

행사장 한쪽에는 우리의 전통 한지로 만든 닥종이 인형이 전시되어 키위들의 눈길을 끌었다. ⓒ 정철용

마침 나는 재뉴질랜드 한인회의 고문이면서 이제 10년을 맞는 뉴질랜드의 한인 이민사를 편찬하는 일을 맡고 있기도 한 한일수 박사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어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육십이 넘어 보이는 그는 제법 유창한 영어로 아직 젓가락질이 서툰 주위의 키위들에게 ‘긴 젓가락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옥에는 아주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찬 식탁이 있는데도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먹지 못해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고통을 느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젓가락을 이용해서만 그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데, 그 젓가락이 너무나 길어서 음식을 집어 자기 입으로 가져갈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오직 긴 젓가락을 이용해서만 음식을 먹도록 되어 있는 천국의 사람들은 아주 맛나게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먹고 즐긴다. 그들은 자기 입으로 젓가락을 가져가는 대신에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이의 입에 넣어주기 때문이란다.

지옥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기 나름에 달려있다는 이 짤막하고 재치 있는 이야기에 내 옆에 앉은 마크(Mark)와 다른 키위들은 깊은 공감을 나타냈다.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그 자리에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이곳 뉴질랜드에 사는 많은 교민들이 한번쯤 들었고 또한 생각했을 ‘지옥과 천국론(한국은 천국 같은 지옥이고 뉴질랜드는 지옥 같은 천국이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옥은 이곳 뉴질랜드에 사는 우리 교민들이 지나치게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 역시 뉴질랜드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곳 현지 키위들에게 마음을 열고 문을 개방한다면 지옥은 천국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한국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은 잃지 말아야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들 키위 문화와 사회에 배타적으로 등을 돌리고 무관심하게 대한다면 우리 역시 똑같은 대접을 그들로부터 받게 된다는 점을 나는 깨달은 것이다.

a 뉴질랜드 럭비 국가 대표팀 올 블랙이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마오리 전통 춤 하카를 선보이고 있다.

뉴질랜드 럭비 국가 대표팀 올 블랙이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마오리 전통 춤 하카를 선보이고 있다. ⓒ 정철용

뉴질랜드에 와서 한 번도 보지 않았던 뉴질랜드 올 블랙 팀의 럭비 경기를 어젯밤 12시가 넘도록 내가 지켜 본 것은 바로 그런 자각 때문이었다. 지난 2002년 한국의 태극전사가 월드컵에서 4강에 머문 것처럼 뉴질랜드의 검은 전사들도 아쉽게도 4강에 머물고 말았다.

작은 것이지만 이렇게 조금씩 이곳 키위들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배우고 또한 존중해줄 때 그들 역시 우리 문화와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해주게 된다는 것을,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뉴질랜드의 당당한 한국인 코위(Kowi)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2003년 한국의 밤’ 행사는 내게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키위와 코위가 만나 서로의 입에 맛나고 풍요로운 음식을 집어 넣어줄 때, 그 때야말로 정말 천국 같은 천국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로 시작하는 한국 노래 ‘연가(戀歌)’의 원곡인 뉴질랜드 노래 ‘포 카레카레 아나’를 행사 마지막 순서에 부를 때, 내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가사는 각각 자기 나랏말로 불렀지만 그 선율은 하나로 합쳐졌던 키위와 코위의 ‘연가’, 그것은 우리 한국인들의 뉴질랜드 10년 이민 역사에 있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노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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