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 찾기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15>김해평야

등록 2003.11.17 11:38수정 2003.11.1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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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추수가 끝 난 텅빈 들판

추수가 끝 난 텅빈 들판 ⓒ 이종찬


그래, 스무살이란 나이도 한 달 남짓 남겨둔 그 해의 나는 김해평야의 텅 빈 벌판을 마구 떠도는 바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때도 아마 지금처럼 늦은 가을이었을 거야. 그때 나는 가혹하게도 나를 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어. 나를 버리다니? 자살? 마음 비우기? 아니야. 이제까지 살아온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찾겠다는 것이었지. 즉 가식된 나를 가차 없이 버리고 진실된 나를 찾아 진실된 삶을 살아 보겠다는 것이었어.

그날은 술이 만신창이가 된 채 낯선 김해평야를 고함치며 달리고 있었지. 김해평야 곳곳은 부지런한 농민들이 흘린 땀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어. 그런데 웬 불한당 같은 놈이, 아니 자신의 모두가 정돈되지도 않은 놈이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김해평야를 마구 달리고 있었으니….

그 꼴이 참말로 가관이었을 거야. 게다가 농민들의 피와 땀이 배어 뿌리가 실하게 든 무와 마악 노오란 속내를 동그랗게 말고 있는 배추밭을 마구 짓밟으며 송아지 새끼처럼 날뛰고 있었으니…. 그래, 그랬으니까 고요하게 흘러가는 낙동강이 이마에 주름살을 마구 새겼지.

내가 살아온 만큼의 세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책에서 적당히 배운 지식과 콩알만큼 살아온 인생의 체험으로 마구 쫑알대는 나를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정한 나를 찾아 이 거친 세상과 씨름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나이다.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와서 마침내 목숨이 다하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삶이란 것이 무엇인가? 주어진 여건 하에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살면 한세상 잘 살아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 바람은 형체도 없이 사물을 흔들지 아니한가.

바람은 사물을 흔들 때
비로소 잊혀진 제 얼굴을 찾는다

깃발은 힘차게 휘날릴 때
비로소 죽어버린 제 생명을 일으킨다

바람과 깃발은 서로 아끼고 두려워하지만
제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철천지 원수가 되기도 한다


바람과 깃발은 맨살을 부벼
꼭 하나가 되는 그날
비로소 이 세상의 참 사랑을 낳는다


(이소리 '바람과 깃발' 모두)


그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의 나는 어느 백사장에서 물구나무 서기를 계속하고 있었어.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기를 수십 차례…. 역시 하늘로 걸을 수는 없었어. 난 바람도 될 수 없었던 거야.

그럼 난 뭐지? 남들처럼 웃음과 기쁨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웃음과 기쁨을 오히려 거부하고 대화조차 거부하는, 난 아마 사람이 될 자질이 없었는지도 잘 몰라.

그래. 그해 늦가을부터 나는 스물하고도 한살이 더 되는 이듬해 늦가을까지 무서운 발악을 계속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런 가운데 점차 나는 나 자신이 누군지조차도 모른 채 서서히 망각해가고 있었지. 또한 그러한 몸부림들이 나를 반 미치광이로 만드는 것이란 것도 모른 채.

내 나이 스물하고도 한 살이 더 되는 그해 11월의 세 번째 일요일이었지. 그날은 아침부터 서러운 가을비가 우리 집 앞마당 감나무 가지에 위태롭게 붙어 있는 낙엽들과 함께 추적추적 떨어지고 있었어.

라디오에선 목소리가 굵은 아나운서가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낭송하고 있었지. 그때 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나도 모르는 서글픔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말았어. 그리고 나는 그 시를 백지에 옮겨 적은 뒤 수첩 속에 고이 접어넣었지.

a 낙엽이 수북히 쌓인 계곡

낙엽이 수북히 쌓인 계곡 ⓒ 이종찬


갑자기 가을비 속으로 떠나고 싶었어.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마산으로 향했지. 마산에는 무학산이 빚어놓은 아름다운 계곡들이 많이 있었어. 그 중에서도 서원곡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락 내리락하던 그런 곳이었지.

나는 서원곡 입구에서 소주 열한 병을 샀어. 왜 하필 열한 병이냐고? 그때가 11월이었기 때문이지. 별 다른 뜻은 없었고. 서원곡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 그날 가을비와 낙엽을 맞으며 서원곡을 오르는 사람은 아마 나뿐이었을 거야.

나는 서원곡 꼭대기 작은 호박소가 있는 널직하고 평평한 바위 위에 비와 낙엽에 젖은 나와 차디찬 소주를 내려 놓았어.

호박소 옆에도, 호박소 안에도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었어. 그리고 낙엽은 내리는 빗줄기와 함께 자꾸만 떨어지고 있었어. 비에 젖은 나 또한 하얗게 나오던 입김마저 어느새 사라지고 없고, 턱이 덜덜덜 떨리면서 몹시 추웠어.

'야, 임마! 감당하기 어려운 절망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배울 수 없어. 사람이란 모순과 모순 속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

그때 하필 그 친구의 그 말이 떠올랐어. 또한 그 말 때문에 느닷 없이 나에게 뺨을 맞고 돌아서던 그 친구, 그 친구의 차거운 눈빛이 춤을 추며 내 눈 앞에서 빙빙 돌다가 또 한 잎 낙엽이 되어 떨어졌어. 차거운 눈빛으로 돌아서던 그 친구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씩씩대던 내 얼굴에도 또 한 잎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목마와 숙녀>란 시가 적힌 종이를 티없이 맑고 시린 계곡물에 띄웠어. 손을 담그면 이내 성에가 하얗게 낄 것만 같은 그 계곡물에 말이야. 그리고 그때부터 깡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어. 낙엽이 가을비에 한 잎 떨어질 때마다 소주를 한 잔씩 마셨지.

하늘에는 비, 땅에는 낙엽, 내게는 술. 그래. 어찌 보면 참으로 조화가 잘 이루어진, 아니, 나 자신도 그대로 한 폭의 풍경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한 잔의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열한 병의 소주를 모조리 비우고 있었어. 낙엽도 내가 열한 병의 소주를 금세 다 비울 만큼 많이 떨어져 내렸고.

"하느님! 이렇게 나는 이렇게 일부러 슬픈 척, 아픈 척하며 살아야만 합니까. 이렇게 스스로의 감정에 도취되어 자신을 쓸쓸함 속으로 몰고 가야만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의 나는 우연한 만남이 우연히 헤어질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리고 차가운 계곡물 위에서 파란 색으로 흩어지는 <목마와 숙녀>란 박인환의 시를 취한 눈으로 오래 바라보았어.

가을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내 옷도 가을비에 축축하게 젖었어. 어깨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고, 내 몸속에서도 술기운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기 시작했지. 그때 나는 빈 소줏병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일어섰어. 그때 가을비와 낙엽이 떨어지는 하늘이 빙빙 돌기 시작했어.

서원곡 계곡 또한 빙빙 돌기 시작했어. 술에 몹시 취한 나는 몇 번이나 미끄러져 서원곡의 바위들과 부딪혔어. 이마에 피도 나고 얼굴 여기저기도 많이 긁히고 피멍까지 들었어. 하지만 이상하게 아프지가 않았어. 아마도 술기운 때문이었을 거야.

a 노을이 발갛게 물든 낙동강

노을이 발갛게 물든 낙동강 ⓒ 이종찬


"야! 너 이 꼴이 뭐냐? 어디를 갔다 왔길래 이렇게 걸레가 되었어. 그 놈의 시 한 편 건지려고 스스로를 이렇게 망가뜨리다 보면 시집 한 권 내기도 전에 시가 되어 버리는 게 아냐?"

"……"

"차라리 이럴 바에는 시를 쓰지 마. 그리고 꼭 이렇게 해야만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니야. 간접 체험이란 것도 있잖아. 멍청하기는. 야, 딴 넘들은 너처럼 그리 안해도 좋은 시를 잘도 써대던데, 너는 참 고집도 세. 시인이란 말이야 적당히 현실과 타협도 하고 때로는 가식도 필요해."

"그러시는 선생님이나 그렇게 쓰세요. 저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저는 시를 찾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진실만을 쓸 겁니다. 그것도 제가 직접 겪은 체험이 아닌 것은 쓰지 않을 겁니다. 소설이면 몰라도 어떻게 시를 적당히 그렇게 쓸 수 있습니까? 저더러 미친 놈이라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해도 다 저물어가는 노을이 몹시도 아름다운 어느 저녁, 드디어 나에게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어. 유난히도 저녁놀이 빨갛게 내린 서쪽 하늘 아래 바짝 마른 겨울나무가 지금은 비록 서글퍼 보이고 죽은 것 같아 보이지만 춥고 눈보라 치는 긴 겨울을 지나면 이내 새로운 잎사귀를 솟아낸다는 것을.

또한 남이 버려둔 슬픔의 참모습들을 사랑해야 되지 않겠는가. 진정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 슬픔의 뿌리를 알아야만이 남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의 모든 그늘진 삶들을 따스하게 보듬어 내면서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보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나의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일 때 남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며, 그 앎으로 나를 잣대질하다 보면 진정한 나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겠는가.

그래. 이제 뜨락으로 나가 잊어버린 내 얼굴을 찾아야겠다. 그리고 다시한번 추적추적 내리는 낙엽 같은 늦가을비를 흠뻑 맞아야겠다. 온몸이 비 그 자체가 될 때까지 나는 나의 비를 맞아야겠다. 그래. 어쩌면 나는 바람이 아니라 이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비가 되고 싶었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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