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 R. 톨킨이 수년간의 노력을 들여 썼다는 가상 역사소설 <반지의 제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상업주의에 현혹되어 있는 영화 비평가나 문학 평론가들은 영화로 제작되어 커다란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이 그 여파로 책방에서도 가장 잘 팔리는 서적들의 대열에 합류했음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라느니, 무슨 컨텐츠니, 상품이니 하고 목청껏 떠들어댄다.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주장하면서, 문화영역에서까지 숨김없이 장삿속을 드러내는 양태는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제우스의 사자이자 상업의 신 헤르메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상혼이 아닐 수 없다.
서구문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그다지 새로운 작품이 아니다. 우선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 <오딧세이>에서 빌려온 문제발생-목표설정-난관극복-귀환의 기본적인 서사구조가 그렇고, 작품의 줄거리가 선과 악의 대결구도에 기초하고 있으되, 전자가 궁극적인 승리를 얻는다는 결론은 이미 지나치게 진부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웅들과 요정, 반인족 및 동식물의 신들이나 괴물들의 형상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신화들과 민간전승 및 전설들의 차용이거나 변용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테세우스 영웅담'이나 '이아손 원정대' 이야기, 혹은 북유럽의 '오딘 신화'와의 친연성을 본보기로 들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지의 제왕>에 쉽게 매료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반지의 제왕>은 일반적인 '판타지 소설'과는 그 궤를 달리 한다. 영문학 교수직을 역임한 지은이는 그런 소설들에 고유한 지나친 비약과 무사실성과 억측 및 과장 따위와 치열하게 싸운다. 그는 끊임없이 독자에게 사건의 시간적 경과와 등장인물들의 공간이동에 대하여, 또한 그들이 처한 사회적-역사적-자연적 환경과 상황들과 심리적인 상태까지도 상세하게 제시한다.
나아가 작가는 설명이나 제시가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부록을 통하여 독자의 이해를 증진시킨다. 그가 구사하는 다양한 문체와 장중한 스타일, 자연과 심리묘사는 이미 하나의 흠결 없는 성취에 도달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반지의 제왕>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 작가들의 마구잡이 식 허구와 독자들의 무한한 관용에 전혀 의지하고 있지 않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지의 제왕>에 내재된 가장 큰 미덕은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상상력의 출발점은 개인적-사회적 제약의 굴레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다. 우리나라의 부모 자식관계와 같은 아주 근본적인 억압관계나 '국가보안법' 같은 이념적인 압제로부터, 분단상황에 기초하여 기승을 부리는 보수적인 시각과 관점으로부터 일탈하여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에 출발점을 두고 있는 끝을 모르는 상상력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으로부터 <반지의 제왕>은 생산되었다. 톨킨이 작품의 창조에 착수한 것은 1950년대 초반으로 알려져 있다. 그 시절은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전 유럽을 휩쓸고 있었으며, 대서양 건너편의 신흥 강대국 미국에서는 이른바 '매카시 선풍'으로 진보적인 좌파 지식인들과 노조 지도자들이 혹독한 시련을 겪던 시기였다. 바로 그런 상처와 고통의 시기에 그는 불안하고 안타까운 현재의 시공간을 찢어버리고 전혀 다른 상상의 세계로 날아간 것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같은 일련의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자연친화'와 '생태문제'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실현한 영화작가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훨씬 앞서서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과 공생을 설파한 톨킨의 시선에서 넉넉함과 유연함을 향수할 수 있는 오늘날의 독자와 관객은 얼마나 행복한가!
우리의 문학과 예술, 즉 영화나 연극 그리고 소설에는 무엇보다도 풍요로운 상상력의 부재나 빈곤이 지배적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민간속설이 지배하는, 행정관청 주도의 국가정책과 그것의 실현에서 야기되는 국가지상주의, 그리고 사-농-공-상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계급적인 서열화가 우리사회의 상상력 부재를 촉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디 여기에 멈출 수 있겠는가. 조선왕조 시대 선비들의 거의 모든 독서와 사유의 종국적인 귀착점은 벼슬살이, 즉 과거급제로 모아졌으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 대학가를 휩쓸고 있는 '고시열풍'과 전혀 동일한 맥락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현실 지상주의, 문학과 예술에서 건조한 사실주의 고착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바야흐로 21세기 다양성의 시대, 문화의 시대, 자유로운 사유와 상상력의 시대에 우리는 저 견고한 '땅바닥 사실주의'로부터 (눈앞의 현실과 오늘만을 고집하고, 거기에 함몰되어 있는 우리 문학과 예술의 치열한 현재주의를 나는 '땅바닥 사실주의'라 부른다) 드높이 날아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점이 <반지의 제왕>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중요한 전갈일 것이다.
반지의 제왕 보급판 세트 - 전7권 (반양장)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외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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