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가지면 하루가 길어져, 힘들다구"

지금 대학로 극장에 가시면 '도라산 아리랑'을 보실 수 있습니다

등록 2003.11.18 02:14수정 2003.11.1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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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완자무늬의 '도라산 아리랑'(최송림 작, 김태수 연출, 정대경 작곡)은 12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입니다. 경의선이 개통되고 남북이 바로 연결되는 시점이 배경이고요. 문화관광부 선정 전통연희창작가무극이기도 하지요.


'도라산 아리랑'에는 '북청사자놀음'이 극중 극 형태로 등장합니다. 극본을 쓴 최송림씨가 감사의 뜻을 밝히고 있듯 심우성 공주민속극박물관장을 비롯한 심사위원들과 조선족복지선교센터 임광빈 목사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이 연극을 제가 처음 접한 건 지금으로부터 4주전 종로구청 소유의 연극 연습장에서였습니다.

저는 이달 말이면 동네 대형할인점의 파트타이머 캐셔가 된 지 3개월째가 되는데요. 한달 전 '친절접객완성을 위한 등반대회'라는 명목으로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던 일이 있습니다. 그 다음 주 쉬는 월요일, 북한산엘 한 번 더 가고 싶었던 저는 이번엔 '친절접객완성' 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그냥 가을산을 느끼고 싶었고,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들을 처음 본 건 북한산 정자 쉼터에서였습니다. 어찌 어찌 만나게 된, 생전 처음 접해본 연극을 한다는 이들은 몸에 맞는 옷 같은 느낌이었겠지요. 보자마자 그들이 준비 중이라는 연극을 한 번 보고 싶어졌으니까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들의 연극 연습 현장에 쫓아갔던 이후, 둘째 주 월요일과 셋째 주 월요일, 그리고 지난 14일(금)의 개막공연까지 지켜본 감상은 뭐랄까. 집이 지어지는 것, 혹은 뭔가가 '조물딱 조물딱' 빚어지는 것을 뜨문뜨문 지켜보게 될 때의 느낌이었을 겁니다.

계산대 근무를 하면서 한가할 땐 한가한 것이, 정신없을 땐 정신없는 것이 도대체 쉽지가 않은 나날, 이상한 손님 만나면 맘이 상하고 폐점 시간 넘게까지 계산대에 밀려서 있는 사람들을 야속해하며 시간을 보내는 저는, 연극을 삶으로 선택한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타인의 삶을 구경하고 상상하면서 눈물이 찔끔 찔끔 날 정도로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극음악 담당 겸 소도구 제작 담당이기도 한 정대경 선생님이 '열심히 하는 건 소용없다, 잘 해야지. 열심히 안해도 좋으니 잘만 해라'라고 하면서 배우들을 다그칠 때는요, 무슨 일이든 삶의 현장이 되고 보면 사는 일은 다 치열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기도 했습니다.

연극 '도라산 아리랑'의 주인공은, 소리를 배우기 위해 이북에 처자를 두고 월남했다가 전쟁을 만나 소리도 배우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엿장수, 칼갈이 등을 전전하며 살아온 한평생의 한을 달래며 언젠가 한 번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볼 '방짜 징' 만드는 일에 매달려 사는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의 유복녀는 북에 남아 평생 수절한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를 찾기 위해 유명한 배우가 되어 '휘파람 소녀'의 남한방문 공연을 계기로 아버지와 상봉합니다. 할아버지가 남한에서 얻은 색시는 아들을 낳자마자 세상을 뜨고요.

그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를 힘들게 하던 세월을 지나 아들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월남에 다녀온 후 '사람이 되어' 어느 만큼 해소된 듯하나 아들이 '통일 알레르기'가 있다고 여기는 아버지에 대해 아들은 속깊은 외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할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구인 애꾸눈 할아버지는 해병대 창군 멤버로 6.25 전투 때 잃은 한쪽 눈알이 지금도 고향산천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면서 고향 수풍댐과 물길이 닿아있는 임진강까지 일부러 가서 길어온 물로 양파를 키우며 살고요.

그 할아버지와 가슴 짠한 로맨스를 형성하는 수풍댁 아줌마는, 연변에 두고 온 병든 남편과 중학교 다니는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꾸눈 영감님에게 위장결혼 서류를 해달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수풍댁을 맡은 강선숙 선생님은 전국 판소리 명창 대회 대상 수상자인 국악인이며 연극인입니다. 주인공 할아버지 역의 공호석 선생님, 애꾸눈 할아버지 역의 조영선 선생님, 그리고 주인공 할아버지의 회상 장면에서, 월남한 엿장수 청년을 잡아다 '빨갱이'로 몰아가며 '명콤비'로 고문하는 형사 역의 김경수님, 이태환님, 유복녀이자 극중 극 '북청사자놀이'의 의원 역을 맡은 천정하님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개막 당일 공연을 보고 난 40대 여성 관객은 "도라산 역이라는 가상의 통일공간을 만들어놓은 것이 참 좋았다. 첫 장면의 그 아리랑 음악이 나온 게, 마지막 장면하고 맞물린 것이 너무나 좋았다. 소극장에서 하기는 좀 아깝다. 대극장에서 했으면 참 좋겠다. 구성에 있어서도 완벽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내일 모레 칠순이신 저의 어머니는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에겐 공감대를 형성하는 줄거리도 좋고, 전반적으로 음악 흐름이 너무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음악은 매 공연 생음악으로 연주됩니다. 해금과 아코디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즐거움도 지나칠 수 없는 매력입니다.

"지난 20세기는 폭력의 세기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 폭력의 희생으로 우린 아직도 분단의 아픈 역사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과 화두는 광복에서 통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 분단의 시작은 사상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그 뒤를 떠받치고 있는 외세들의 농간으로 보이나 사실은 우리모두가 함께 잘 살아보자는 마음, 인간답게 사는 게 무엇인가에서 시작된 싸움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 근본 뿌리는 같으나 결과는 서로 적대시하고 피를 흘리고 서로 갈가리 찢긴 상태로 되고 말았으니 누구 탓을 하며, 누굴 원망하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꼬인 매듭을 하나 하나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시작했던 그 첫마음으로 되돌려 놓아야 하겠다. 상처는 서로 달래고 헤어진 가족이 서로 만나고 서로의 생각을 얘기하고 '홍익인간'에 근거하여 우리 민족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경의선'이 개통되는 것은 가로막힌 우리의 마음, 왜곡된 우리의 인성을 되찾는 길이다. 숨통이 트이고 막힌 혈맥이 뚫리는 길이다. 인정 많고 이웃과 함께 하고 풍류를 즐기는 우리 민족의 고유의 정서, 천지인(天地人)이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의 순리를 간직하는 민족으로!"


이상은 연출가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희망을 가지면 하루가 길어져…힘들다구…"

이건 오매불망 고향산천을 그리다 경의선 개통 소식을 들으며 숨을 거두는 애꾸눈 할아버지의 대사입니다.

4주전에 처음 만난 이들과 오늘까지 4번의 북한산행을 함께 했고, 그리고 닭똥집과 맥주 1병을 얻어먹은 바 있는 저로서는 훌륭하면 훌륭한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이들의 작업 '도라산 아리랑'을 좀 더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저의 이 '사는 이야기'가 작은 보탬이 된다면 내일, 그리고 또 내일… 희망이 있기에 긴 하루를 견뎌내는 일에 조금은 더 힘이 날 것 같습니다. 모쪼록 이 황폐한 가을에 보다 많은 분들이 대학로 극장에 한 번 다녀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연은 24일까지. 평일은 7시 반, 주말 4시 반과 7시 반 2회 공연이고요. 대학로 극장은 지하철 4호선 혜화역보다는 1호선 종로5가역에서 더 가깝습니다. 공연문의는 02-766-0773으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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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기 기자만들기 과제 수행을 위해 가입함. 일기체, 수필체로 할 수 있는 잡다한 이야기. 주관심사는 사람과 문화. 근성이나 사명감은 거의 맹물 수준. 훈련을 통해 오마이뉴스의 다양성과 열린 진보 사회를 위한 실뿌리로서 역할을 다하며 의미있게 살다죽길 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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