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떠난 강천산

산에서 사람을 배우다.

등록 2003.11.19 08:53수정 2003.11.19 15:41
0
원고료로 응원
a 병풍바위 위로 물을 끌어올려 만든 인공폭포인 병풍폭포

병풍바위 위로 물을 끌어올려 만든 인공폭포인 병풍폭포 ⓒ 장성필

이라크 파병이다 특검이다 해서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잠시나마 TV의 따가운 수다를 뒤로 하고 새소리와 물소리, 낙엽 밟는 소리를 듣기위해 산행을 떠났다. 광주에서 버스로 1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곳은 강천산. 강천산은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에 터를 잡고 있었다. 높이 583미터 정도의 결코 크지 않은 산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산이다.

등산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강천호이다. 너무도 조용하고 고요한 호수의 수면은 지난 가을 한바탕 휩쓸고 갔을 사람들의 흔적을 애써 지우고 이제는 쉬고 싶어하는 듯했다. 가끔씩 호수의 고요를 깨는 것은 떨어지는 낙엽과 작은 물고기의 펄떡임 뿐이었다.


입장료 1000원을 내고 강천산행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병풍폭포. 2년전 강천사를 처음 갔을 때만 해도 병풍바위라 하여 기암절벽이었으나 관광객을 위한 배려 아닌 배려를 위해 지금은 인공폭포가 만들어졌다. 사람의 욕심과 탐욕은 자연이 우리에게준 아름다운 바위마저도 가만 두지 않는다. 펌프는 36미터의 높이차를 극복하고 인간에게 기꺼이 즐거움을 선물하기 위해 오늘도 힘차게 돌고 있을 것이다.

강천사 앞에서 산나물이며 약초를 파시는 아주머니는 "저거 돌릴라고 한달에 200만 원씩 전기요금 낸다요. 옛날 뱅풍바우 있을 때가 더 좋았는디…"하며 한적하고 조용한 강천산이 우람한 폭포소리에 질려 산새고 멧돼지고 다 도망가고 거기에 사람들만 가득할까봐 걱정이라고 하신다.

강천산에는 아직도 가을이 있었다

a 강천산 군데군데 남아있는 단풍잎

강천산 군데군데 남아있는 단풍잎 ⓒ 장성필

입동이 지나고 강원도 산간지방에는 벌써 눈이 내렸다고 난리지만 남도의 한자락인 강천산에는 아직도 곳곳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가 있었다. 단풍으로 치자면 정읍의 내장산에 비겨도 아깝지 않다는 강천산의 단풍은 한국 토종의 애기단풍이라 겨울이 눈앞인 11월 말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지나가던 중년의 한 산벗이 귀띔해 주었다. 계곡 옆으로 심어놓은 메타세콰이어와 군데군데 남아있는 단풍, 계곡물 소리를 벗삼아 20여 분 올라가서야 강천사를 만날 수 있었다.

강천사는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태능이 재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석탑과 석등만 남고 모두 소실된 것을 주지 김장엽이 다시 신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한적하고 조용한 절이지만 옛날에는 12개의 승방과 12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다고 한다. 절을 세운 것도 인간이고 절을 태워버린 것도 인간이니 참 그 인간이라는 존재의 덧없음과 어리석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강천사 5층 석탑은 임진왜란 당시 절이 모두 소실됐을 때도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도 산 깊은 이곳을 비켜 갈 수는 없었나 보다. 회문산 지구전적비에서, 총탄에 맞아 부숴진 석탑에서 전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구름다리에서 사람을 보았다


a 구름다리

구름다리 ⓒ 장성필

강천사를 지나 20여 분 올라가다 보면 길이 70미터, 높이 50미터인 구름다리가 나온다. 보기에는 그냥 건너 갈 수 있겠지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건넜으나 중간쯤 이르러 뒤따르던 사람들이 장난삼아 흔들기 시작하니 나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하고 옆의 난간을 잡게 되었다. 사람들은 스릴을 느끼고 좀더 쉽게 산을 정복하기 위해 구름다리를 만들었으리라. 그러나 곧 그러한 인공물들이 나약한 인간의 내면을 보게 하고 후회하게 만든다. 자연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름다리를 건너 가파른 돌밭으로 된 등산로를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는 신선봉에 이른다. 같이 가던 일행이 자꾸만 처져 등반 1시간 만에 올라갈 수 있었지만 느릿느릿하게 가는 산행도 나름대로 멋있고 운치가 있었다. 나무도 볼 수 있었고 새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낙엽도 밟을 수 있었다. 어쩌다 가는 산행의 경우 시간에 쫓겨 빨리 정상을 보고 내려와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욕심으로 땀을 비오 듯 흘리며 올라가는 일이 많다. 그런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이번 산행이 더 값지고 보람된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신선봉 정상은 나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산을 뒤엎고 속세의 세상을 가려 모든 걸 삼켜버릴 것 같은 운해의 거침과 장엄함은 아니었지만 포근하게 세상을 감싸는 안개를 볼 수 있었다.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정확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지만 내가 본 것을 그냥 안개라고 하겠다. 한동안 신선봉 전망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던 그것은 어머니의 젖가슴같은 포근함 때문이었다. 안개 사이로 보이는 아련한 민가의 모습과 겨울을 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을 사람들, 그리고 그 틈 사이사이에 피고 있을 사람들간의 따스함.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올 한해 나는 무엇을 수확했고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다시금 생각해 본다. 강천산이 나에게 준 겨울 선물을 마음 가득 담아왔지만 내려오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움을 느꼈다.

a 신선봉에서 본 풍경

신선봉에서 본 풍경 ⓒ 장성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2. 2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3. 3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4. 4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5. 5 "윤 대통령 답없다" 부산 도심 '퇴진 갈매기' 합창 "윤 대통령 답없다" 부산 도심 '퇴진 갈매기' 합창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