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은 결코 한번에 깨어지는 법이 없다

<시 더듬더듬 읽기 ⑪> 이정록 시인의 '줄탁'

등록 2003.11.23 09:46수정 2003.11.2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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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부질없는 논쟁들이 쌔고도 쌨다. 그 중에서도 가장 드라이하고도 무미건조한 논쟁이 아마도 '창조냐?진화냐?'라는 신학적 논쟁일 것이다.

쥐뿔도 모르고 이 논쟁을 턱하니 제 입에 받아문 사람은 그 뜨거운 열기에 화들짝 놀라 엉덩이에 불붙은 송아지 도망치듯 재빨리 그 논쟁을 끝내려하지만 그때는 이미 혓바닥을 절반 이상 덴 뒤끝이다.


이 인간의 기원에 관한 소모적 논쟁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또 하나의 고리타분하고도 생산성 1%도 안되는 논쟁이 있으니 이른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닭의 기원에 관한 쓰잘데기 없는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일찍이 영농후계자의 길을 걷자고 결심한 바 있는 나는 어렸을 적 그 전초전 격으로 닭을 길러본 바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논쟁이 닭의 생태와 생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책상물림'들의 공허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소싯적부터 익히 알고 있었던 바다.

닭은 쉴 새 없이 앞마당이나 동네 고샅으로 마실을 다닌다. 그러니까 요사이 높은 양반들이 즐겨하는 민정시찰의 원조가 닭일시 분명하다. 동네를 그냥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고추나 콩 따위 곡물 널어 놓은 멍석 위에 올라가 두발로 히비적거려 흩어놓는다.(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김소월이 혹 이 광경에서 착안하여 <초혼>이라는 시를 지은 게 아닐까. 산산히 흩어진 깨여!콩이여!)

어미 닭은 절대로 뒤쳐지는 법이 없다. 병아리떼를 끌고서 선두에서 시찰을 진두지휘한다. 짐작컨대 기본이 제대로 안 된 나라는 마구 헤집어놔야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이 어미 닭의 정치적 신조인 모양이다.

그렇게 민생 시찰에 사직의 명운을 걸고 돌아당기던 어미 닭의 귓전에 어디선가 사근사근하면서도 100%의 애정으로 당의정을 입힌 목소리가 들려온다.


"중전, 후세를 위하여 이제 그만 둥지에 좌정하시지요?"

발 한짝 깨금발하고 귀 한쪽 쫑긋 세워 들어보니 아, 미덥고 사랑스런 그대 수탉의 목소리가 아니던가. 어미 닭은 그 애정에 감읍하여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이며 마침내 시한부로 출가를 결심하게 되는거다.


어미 닭은 서둘러 목욕재계하고 조용하고 약간 어두컴컴한 곳에 있는 둥우리에 결가부좌를 튼다. 모계선사(母鷄禪師)는 눈썹 하나 꿈쩍 않고 수도에 용맹전진한다. 그렇게 꼬박 21일간을 선정에 들고나면 이윽고 새끼를 부화하게 된다.

이걸 일러 속세 인간들은 줄탁이라 하거니와, 간화선을 주로 수행하는 선가에서 풀이하자면 알이란 일종의 화두이며 줄탁이란 한 소식 깨쳤음을 뜻함일레라. 그럼 줄탁이 정말로 뭐시다냐. 줄탁이란 안에서 새끼가 알 껍질을 빨아대고 밖에서는 에미가 껍질을 쪼아대면 병아리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얘기다. 병아리의 부화 과정이 이츰저츰 하거늘 어느 시러베 아들 놈이 "알이 먼저"란 헛소리를 길바닥에 깔고 다니느냔 말이다.

이 쯤에서 이정록 시인이 부화한 詩 <줄탁>을 한번 읊고 가야쓰것제?

이정록 시인
이정록 시인안병기
어미의 부리가
닿는 곳 마다

별이 뜬다

한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밤하늘엔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빗나간 부리질이 있다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친다

(이정록 詩 <줄탁> 全文)


하여간에 나는 올해 참 많이도 '히비작거리고' 돌아다녔다. "청노새 안장 위에 옆전 열닷냥" 실어주던 이 누구 하나 없었건만 한양 천리를 쥐방구리 드나들듯 드나들었으며 급기야 남해 땅에까지 끼대가서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 장군의 유언을 지키는 것이 이제는 결코 정보통신부 소관 업무가 아니라 자치단체 고유사무로 이관 되었음을 실감한 바도 있었다.

벌써 연말이 다가온다. 이제는 나도 쓰잘데기 없이 쏘다니는 일로부터 돌아와 이 한해를 깔끔하게 갈무리하는데 전념할 때가 아닌가 싶다. 돌아오는 형식이야 "누님처럼" 돌아오던 "암탉처럼" 돌아와 좌정하던 하등 논쟁거리가 될 일이 아닐 것이다.

누가 뭐래든 난 남들이 모두 뛸 때 나 혼자서라도 "NO"라고 할 수 있는 "나"가 좋다. 그런데 뛰긴 누가 뛰냐고? 망둥이도 뛰고 꼴뚜기도 뛰고, 국회의원 후보자들도 뛰고, 제비 몰러 나간 사람들도 뛰고.

창망분주한 연말일수록 좀 더 깊숙히 침잠하여 진지하게 내 자신에 대한 줄탁을 시작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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