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란 철천지 원수들(?)이야!"

[새벽을 여는 사람들 49]삼천리 연탄 배달원 박명석&한성녀 부부

등록 2003.11.24 06:21수정 2003.11.2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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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소설(小雪). 겨울을 예고하는 한파에 눈이라도 퍼부을 듯 시린 바람이 온몸을 할퀸다. 자꾸만 외투 속으로 움추러들고 싶은 초겨울 새벽. 분주히 연탄을 뽑아내는 윤전기의 굉음과 근로자들의 웃음소리가 한기를 녹인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위치한 삼천리e&e는 금천구 시흥동 고명산업과 함께 서울에 남은 마지막 연탄공장이다. 68년에 태어난 삼천리e&e는 하루 평균 20만장의 연탄을 생산한다. 그간 삼천리e&e가 생산한 연탄을 줄잡아 그 길이를 측정하면 최소 지구를 스물 다섯 바퀴나 돌 수 있다는데. 30여년간 서민의 난방을 책임져 온 근로자들 또한 평균 20여년 이상 근속하며 공장을 지킨 대가족들이다.

버튼 하나면 언제든 손쉽게 뜨거운 물을 쓸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300원짜리 연탄 한 장에 의지해 겨울을 보내는 서민들이 많다. 특히 IMF 이후 연탄을 찾는 독거노인과 서민들이 꾸준히 느는 덕에 오래된 윤전기가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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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부인 한성녀(46)씨와 함께 연탄을 배달하는 박명석(47)씨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삶의 철학이다. 강원도 인제가 고향인 그는 맨몸으로 상경, 보증금 50만원의 월세방에서 시작해 꾸준한 연탄 배달로 내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네 식구의 자랑스런 아버지이자 '박명석 삼천리 연탄배달'의 사장이기도 한 그는 2.5t의 트럭으로 전국을 누빈다. 하루 두 차례 2000장 가량의 연탄과 리어카를 싣고 배달을 하는 박씨에겐 나이 마흔에 있을 법한 그 흔한 뱃살도 없다.


"배 나올 시간이 어디 있어? 살 빼고 싶은 사람은 하루만 날 따라다니면 돼!"

22개의 구멍이 뚫린 연탄의 무게는 3.6Kg. 박씨는 연탄집게로 양손에 4개씩 한번에 8개를 나른다. 게다가 연탄을 필요로 하는 곳은 지역의 특성상 손수 리어카를 끌고 올라가야 하는 곳이 많다. 언젠가 아버지 일을 돕겠다고 따라나온 첫째 딸 미영이(20)는 고생하는 아버지 모습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끔은 돈도 지겨워. 우리가 움직인 만큼 제아무리 돈으로 연결돼도 몸이 피곤할 때는 지겨워. 취미랄 게 뭐 있나. 일 끝나면 잠자기 바쁜데. 가끔 사우나에 가는 게 고작이지."

수도권 배달은 새벽 6시, 강원도 등지의 지방 배달은 이른 새벽 2시부터 일어나 배달 채비를 갖춘다. 일요일 외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 근무하는 박씨에겐 연탄이 그의 모든 것을 있게 한 '가보' 같은 존재라고 한다. 현재 그는 기름 보일러를 사용하며 문명의 이기를 굳이 마다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박씨는 연탄이 주는 따끈따끈한 그 아랫목의 맛은 제 아무리 다른 난방 연료가 발달해도 결코 따라갈 수 없다며 사라져가는 연탄의 온기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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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가슴이 답답해서 창문을 열고 새벽 찬바람 마셔봐도 님인지 남인지 올 건지 말건 지 이 밤도 다가고 새벽닭이 우네. 내 모두 잊으리라. 입술 깨물어도 애꿎은 가슴만 타네 정 하나 준 것이 이렇게 아플 줄 몰랐네 아~~아~~몰랐네...~ "

'현당'의 <정 하나 준 것이>는 노래 부르기를 즐겨하는 한성녀씨의 18번 곡이다. 한씨 또한 둘째 아들 성보(17)를 낳고 남편 박씨와 함께 연탄 배달을 시작했다. 화장실 갈 때도 같이 다닌다는 이들 부부는 20년을 살았지만 남들이 40년을 산 것과 같은 시간을 나눈 셈.

두 아이의 아침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미안해 하는 한씨는 출근 후 이들을 깨우는 안부 전화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화장기 없는 얼굴인데도 유독 고운 피부를 갖고 있는 비결이 무어냐 물어보니 "신랑이 잘해 줘서"라며 너스레를 떠는 한씨. 그는 다음 생에 태어나도 게으름을 모르는 지금의 남편과 같이 살 거라며 힘주어 말하고, 이에 박씨는 애정 어린 미소로 화답했다.

"처음 시집 올 때만 해도 뜨거운 물이 귀해 머리도 자주 못 감았는데 지금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언제든 뜨거운 물이 나와. 정말 우리 나라의 발전 속도는 대단한 것 같아. 연탄불에 바로 구워 먹는 삼겹살 맛을 알아? 또 밥의 뜸도 잘 들여지고 빨래도 더 뽀얗고 하얗게 잘 삶아지고…."

점점 희미해지는 연탄의 온기에 한씨 또한 섭섭해지는 건 마찬가지. 무엇보다도 이들 부부는 연탄의 공급이 줄어듦에도 연탄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는 서민들의 시린 겨울을 걱정했다. 남과 더불어 하는 것이 '장사'라고 정의하는 한씨는 가장 중요한 영업 노하우로 '웃음' 을 꼽았다. 이어 고된 와중에도 밝게 웃을 수 있는 노하우를 물으니 이들 부부는 "평안한 가정" 때문이라며 여전한 웃음으로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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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사람살이가 언제나 해뜰 날만 있나? 비도 오고 항상 바람 잘 날 없는 게 사람 사는 거지. 우리라고 문제가 없었겠어? 싸울 때는 우리도 가끔 떨어져 있고 싶은데 일 때문에 그렇지 못해 힘들었지. 화날 때는 남편의 좋은 점만 생각해. 요즘 젊은 부부들은 서로 아무도 지지 않으려 하는지, 쉽게 이혼하는 모습들이 안타까워."

시댁 식구들에게 인정받는 걸 일의 보람으로 꼽는 한씨는 박씨와 함께 건강한 가정을 꾸린 것에 대해 뿌듯해 했다. 이어 그는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손 벌리지 않으며 박씨와 같이 일군 당당한 인생에 자부심을 표했다.

"부부란 철천지원수들이야.(웃음) 남이면 싸울 필요도 없이 그냥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지. 하지만 부부는 끝까지 같이 살아야 하니깐 계속 싸우고 또 고쳐나가는 거야. 어떻게 넘기고 함께 살아가느냐가 중요해. 그렇게 하나하나 맞추면서 살아가는 거지."

가정의 평안함을 일의 보람으로 꼽는 박씨가 두 자녀에게 가장 강조하는 건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다. 박씨는 이 가르침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 한씨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을 터. 그는 한씨와 연탄 배달을 하며 함께한 삶을 후회한 적은 없노라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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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고추에 된장 찍어 밥 좀 먹고 가!"

10년이 넘도록 한씨는 처음 본 이가 건넨 따뜻한 이 말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 더러 사람을 깔보는 이도 있지만, 연탄이 배달되는 그 곳엔 "식사 하셨어요?"라고 묻는 서민들의 정겨운 인사가 여전했다. 작은 말 한 마디에 곧 기분이 좋아진 이들 부부는 받을 돈도 덜 받는다.

"으메, 처녀가 다 돼 부렸네! 마누라 가둬 놓야 거써. 데리고 다니다가 뺏기면 어떡할라고 그래? 요새 홀아비들이 얼마나 많은데!"

"마누라 도둑도 있어? 알려줘서 고마워. 연탄 배달이 마누라 잃어 버리면 다 끝이지 뭐."

연탄으로 데운 뜨거울 물에 커피와 함께 이들 부부의 고단함도 같이 녹아들어 간다. 그들의 일은 단순히 연탄 배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연탄의 개수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게 연탄을 쌓는 일도 신중해야 하고 또 빗자루로 뒷정리까지 깔끔히 마무리해야 한다. 이들 부부의 양손엔 연탄집게를 잡느라 20년 묵은 딱딱한 굳은살이 자리잡고 있다. 배달 후 연탄을 쌓고 뒷정리를 하기까지는 단 한 순간도 제대로 허리 필 틈조차 없다.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냥 서 있기가 민망했던 기자는 일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몇 번 연탄을 나르다 오히려 민폐만 끼치고 말았다. 한번에 연탄집게로 8개씩 약 29Kg의 연탄을 나르는 그들이 말한 "긴소매 옷 입은 지 얼마 안됐다" 와 "먹는 게 남는 거야" 라는 얘기를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연 몇 번을 날랐을까. 등줄기에 흐르는 땀은 '한파'라는 말을 우습게 만들었다. 운반하며 맨손으로 만졌던 연탄은 마냥 따뜻하고 정겹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할만큼 차고 묵직한 것이었다. 배달을 마치자 난생 처음 본 아주머님이 연탄으로 물을 데워놨다며 귀하디 귀한 뜨거운 물을 내주셨다. 그 분에겐 머리를 한 번 정도 헹굴 수 있는 소중한 물이었다. 뜨거운 물에 손에 묻은 검은 연탄가루는 씻었지만 왠지 모를 부끄러움은 좀처럼 씻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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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 부부의 얼굴이 시나브로 검게 변하기 시작한다. 잠이 덜 깬 겨울. 이른 해돋이 시간이 가장 곤욕스럽다는 박씨는 "마치 저승길에 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침이 되자 어느 덧 그의 콧등엔 이슬 대신 땀방울이 내려앉아 있다. 그는 "요즘 나이 들어 짤리면 갈 곳이 어디 있냐?"며 자신의 이름을 건 어엿한 사업이 있음에 감사한다.

"모두가 공부를 잘 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겠어? 열심히 해서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건강하기만 하면 뭐든 하고 살 수 있잖아. 바라는 게 있겠어?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돼. 요즘 젊은 친구들 보면 우리랑 달리 대학도 많이 가고 학벌은 높은데 기본이 안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운전을 하다보면 모두가 색맹인지 빨간 불이어도 그냥 막 지나가. 저번엔 내 친구가 젊은 친구에게 훈계를 두다가 맞어서 이빨이 부러지기도 했어."

땀방울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 두 자녀에게도 집안일 등 일을 했을 때 용돈을 준다는 박씨. 그는 현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지킬 것은 지키는 사람들이 되기"를 당부하며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더불어 오직 '나'만이 아닌 '우리'가 함께 어울리는 삶의 소중함을 덧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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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무거운 것과 외출 시 세수를 한 뒤 옷 갈아입고 나가야 하는 것을 연탄 배달의 단점으로 꼽는 한씨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건 '~누구 때문에'라고 말하지 않는 '자립심'이다. 성실이 박씨 삶의 철학이라면 한씨 삶의 철학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다. 한씨는 현 젊은이들에 비해 높은 학력을 지니지 못해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는 다 가졌노라며, 무에서 유를 이룩한 현재에 만족해 했다.

부단한 성실함과 강인한 자립심이 만나 "장학금은 못타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말로 부모님을 위로하는 큰 딸 미영이와 집안일을 돕는 둘째 성보가 태어났다. 한씨의 꿈은 그저 이들이 대한민국에 필요한 존재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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